무언가에 열중하거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영화 <라라랜드>는 현실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뮤지컬 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어 여러 장면들이 굉장히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끔은 매우 환상적인) 현실을 섬세하게 반영하고 있다. 특히 등장 인물들의 심리나 감정, 장소와 상황이 빚어내는 그 순간 특유의 분위기 등을 영화적 기법들을 사용해서 매우 영리하게 표현해냈다.
(본문 내용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두 청춘의 사랑과 꿈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현실에 부딪쳐 끊임 없이 흔들리는 두 청춘,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반짝였던 그 시절을 색색의 장면들로 채워나가는데, 특히 세월이 지나 두 주인공이 우연히 조우하게 되며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두 시간 남짓 흘러가는 영상은 마치 하나의 곡처럼 흘러가는데 겨울로 시작하여 봄을 거쳐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사계절로 묘사된 악장으로 전개되다 대미에서 순식간에 관객들을 울리며(마음을 치며) 끝이 난다.
재즈 피아니스트로 자신만의 소신을 지켜 꿈을 이뤄나가려는 세바스찬과 연기자 지망생인 미아, 이들은 꽉막힌 고속도로 차 안에서 스쳐지나가며 별로 달갑지 않은 첫 인사를 나누게 된다. 이후 시간이 흘러 미아는 친구들과 파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음악에 이끌려 우연히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세바스찬을 만나게 된다.
오너의 취향에 따라 마지못해 피아노를 치던 세바스찬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곡을 바꾸어버리고 급기야는 해고를 당하고 만다. (세바스찬과 미아의 테마라는 제목을 가진 이 곡은 두 사람이 함께한 모든 것들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서정적으로 흘러가다 격변하여 마무리되는 스타일은 세바스찬과 미아가 함께한 시간을 닮았다.)
자기도 모르게 그 앞에서 훌륭한 연주라 극찬한 미아는 화가 난 그에게 무시당하는데... 둘의 이 운명적인 만남은 (밀란쿤데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우연의 새가 어깨 위에 내려 앉은 순간'이 아닐까..
또한 바로 이 '순간'은
이후 두 남녀의 인생에 있어
도돌이표가 될지도 모르는 지점이다.
(영화 후반에서 이 지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세바스찬과 미아의 테마곡이 두 사람이 되돌아갈 수 있는 기호가 된다.)
그들은 또 다시 각자의 삶을 살다 다시 마주치게 되고, 함께하는 탭댄스로 좀 더 가까워진다. 다소 어색함 속에서도 불협화음처럼 어긋나는 듯 어우러지다 맞춰져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이들이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 힘든 재즈 음악처럼 둘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여느 커플처럼 데이트를 나누게 되는데... 온통 별들로 가득한 공간- 별들의 도시인 플라네타리움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절정을 맞게 된다. 깜깜한 무한의 공간을 수놓은 별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춤이 끝나고 둘은 그동안 의도치 않게 성공하지 못했던 키스를 나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공간은 둘의 관계를 상징한다. 서로를 탐색했던 탭댄스는 낮과 밤의 경계에 놓인 언덕에서, 서로에게 푹 빠진 채 췄던 왈츠는 무한의 우주에서, 영화 후반 이별을 암시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한낮의 로맨틱이 제거된 공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사랑'이 전개되는 동안, 두 사람의 '꿈'도 여러 변화를 맞게 된다.
우선 세바스찬은 미아를 위해 고정적인 밴드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의 스타일과 맞진 않지만 돈을 더 벌 수 있는 밴드에 들어간다. 밴드의 성공으로 미아와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만 가고,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결국 심하게 다투게 된다.
한편 미아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 오디션에 도전하나 계속 낙방한 후, 세바스찬의 응원과 지지로 그녀만의 일인극을 계획하여 공연을 올리는데.. 세바스찬은 밴드 스케줄에 쫓겨 뒤늦게 극장을 찾았으나 그녀를 놓치고, 미아는 자신의 작품을 쓰레기 취급하는 관객들의 반응에 실망하고 고향집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헤어지게 된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후 미아의 연극을 인상 깊게 본 오디션 관계자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세바스찬은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고.. 그의 설득으로 그녀는 오디션에 합격하여 프랑스로 건너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녀 옆에는 세바스찬이 아닌 남자와 그녀의 아이가 있는데.. 남편과 우연히 들른 재즈 클럽에서 그녀는 그곳을 운영하고 있던 세바스찬과 조우하게 된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세바스찬은 바로 그 곡, 자신과 미아의 테마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곡이 연주되는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그 곡을 처음 공유했을 때의 그 지점으로 순식간에 돌아가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들게 된다. '만약에 우리가 함께했더라면'의 이미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데... 현실과 환상의 이미지들이 마구 뒤엉켜 압축되어 전개되고 절정에 이르는 음악과 함께 끝이 난다. 퉁하고 무겁게 관객들을 울리는 바로 그 장면을 위해 영화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이나 음악, 연극, 뮤지컬 그 어떤 매체로도 표현하지 못할, 오로지 영화적 기법으로만 가능한 그 장면을 <라라랜드>의 백미로 꼽고 싶다.
많은 관객들이 곡이 끝남과 동시에 미아가 세바스찬의 품에 안기는 장면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굉장히 환상적으로 그려진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현실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몇몇 이들은 두 남녀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긴 상영시간 동안 보여준 내용들이 의미없게 느껴진다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온 이루지 못한 사랑들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걸까.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킨다.
또 결과보다 그 둘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많은 영화들이 연인간의 사랑을 다루는데, 두 남녀가 결혼에 골인하는 해피엔딩 혹은 이별을 맞이하는 새드엔딩으로 마무리를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닌 열린 결말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사람은 헤어졌지만 해피엔딩이라고 이야기한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폭풍처럼 몰아쳤던 '만약에 그랬다면'의 장면이 끝난 후 서로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그들의 사랑을 완성한다. 미완성이었던 두 사람은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또 열렬하게 사랑을 나누며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반짝였을지도 모를 순간들을 함께했다. 그 과정은 나름의 기승전결을 갖춘 완벽한 하나의 곡이었고, 도돌이표를 만났을 때 만약의 장면들을 완성한 후 끝을 맺은 것이다.
누군가 <라라랜드>를 무엇에 관한 영화냐고 묻는다면,
'두 사람이 만나 이루어낸 예술'에 관한 영화라 이야기하고 싶다.
서로를 내밀하게 이해하고 소통하며 함께 연주해나가는 과정은 그 어떤 아름다운 작품보다도 빛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매력을 글로 써내려가기가 매우 어려운 걸 보면, 확실히 정말 잘 만든 영화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