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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오 Mar 15. 2017

최선을 다해 게을러지자

일과 휴식의 그 어디엔가

예전에는 통통하게 보기 좋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여위었니?


몇 년 전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아주 오래 전 봤던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었다.


실연을 당한 후 집에 있던 남자 주인공은 비누에게 왜 이렇게 여위었냐며, 걸레에게는 그렇게 울고만 있으면 어떻게 하냐며 말을 건넨다.


이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지금의 나는
닳아 없어지고 있는
비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영화 한 편, 책 한 권에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무얼해도 공허한 게 도무지 이유를 몰랐다. 몇 년간 쉼없이 일하면서 에너지를 쓰기만 했던 게 아닐까. 이렇게 닳다가 없어져 버릴까봐 두려웠다. 같은 직업군의 지인도 공감이 된다 하니 나만 이상한 건 아닌 거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을 잠시 쉬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두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의욕에 불타 이것저것 계획도 세우고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다보니 시간이 훌훌 지나가버려 슬슬 불안해졌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낼바엔 차라리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일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할거라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잡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어떤 걸 해내야겠다는 목표에 대한 강박없이 무언가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많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보다는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일터에서 에너지를 쏟아낸 후 퇴근해서 집에 오면 녹초가 되었다. 저녁을 챙겨 먹고 집안일도 조금 하고 멍하니 있다 보면 하루가 갔다.


진짜 '휴식'은 '여백'과 같다.

퇴근 후 방전된 상태로 시간을 보냈던 건 '휴식'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공백'과 같았다.


미술시간에 '여백'에 대해 가르칠 때 그건 '공백'이 아닌 '작가가 의도적으로 남긴 공간'이라고 강조하곤 했었다. 그리다가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남긴 건 '이건 여백의 미에요' 라고 우길 수 없다고.


나는 어쩌면 그렇게 시간에 쫓겨 남겨져버린 공백을 '여백'이라 여기고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그림에서 적당한 '여백'을 남기는 것은 무언가를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도 이야기했었다. 그린 곳과 그리지 않은 곳의 균형을 찾아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렇게 주구장창 떠들어댔으면서 정작 나는 일과 휴식의 균형을 찾아나가지 못했던 게 아닐까. 그 결과 이렇게 지쳐버린거고...


무척이나 힘들었던 해에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그렇게 모든 걸 다 쏟아내버리면 오래 가기 힘들다고.. 앞으로 오래오래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면 네가 마음을 잘 다스리고 균형을 잘 잡아야 된다고.


그 때 그 말을 흘려들었던 나는 이렇게 지쳐버렸고, 생각보다 오래 충전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그것을 어디에 쓸지 잘 분배하고 실행시켜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먹을만큼 먹은 나이에 아직도 이런 것에 미숙하다니 나는 그동안 내가 해내야만 하는 너무 외적인 것들에 휘둘려 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좀 더 내밀하게 계획하고 해나갈 수 있도록 내 자신을 믿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


오늘 정말 화창하네.
햇볕 아래 잠깐이라도 산책해보는 게 어때?


내 제안에 일을 해야되기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다며 대꾸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지금을 희생하곤 했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인생이었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항상 쫓기는 듯 불안해보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부지런히 일했던 개미 못지않게 베짱이도 그 달콤한 게으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았을까? 또 명작을 그려낸 화가들 역시 의미있는 공간을 남기기 위해 수백번을 고민하고 연습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해내라는 모토는 '인생의 쉼표(숨표)'를 없애버렸다.


이젠 최선을 다해 쉬고
게을러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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