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오 Mar 15. 2017

최선을 다해 게을러지자

일과 휴식의 그 어디엔가

예전에는 통통하게 보기 좋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여위었니?


몇 년 전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아주 오래 전 봤던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었다.


실연을 당한 후 집에 있던 남자 주인공은 비누에게 왜 이렇게 여위었냐며, 걸레에게는 그렇게 울고만 있으면 어떻게 하냐며 말을 건넨다.


이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지금의 나는
닳아 없어지고 있는
비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영화 한 편, 책 한 권에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무얼해도 공허한 게 도무지 이유를 몰랐다. 몇 년간 쉼없이 일하면서 에너지를 쓰기만 했던 게 아닐까. 이렇게 닳다가 없어져 버릴까봐 두려웠다. 같은 직업군의 지인도 공감이 된다 하니 나만 이상한 건 아닌 거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을 잠시 쉬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두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의욕에 불타 이것저것 계획도 세우고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다보니 시간이 훌훌 지나가버려 슬슬 불안해졌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낼바엔 차라리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일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할거라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잡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어떤 걸 해내야겠다는 목표에 대한 강박없이 무언가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많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보다는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일터에서 에너지를 쏟아낸 후 퇴근해서 집에 오면 녹초가 되었다. 저녁을 챙겨 먹고 집안일도 조금 하고 멍하니 있다 보면 하루가 갔다.


진짜 '휴식'은 '여백'과 같다.

퇴근 후 방전된 상태로 시간을 보냈던 건 '휴식'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공백'과 같았다.


미술시간에 '여백'에 대해 가르칠 때 그건 '공백'이 아닌 '작가가 의도적으로 남긴 공간'이라고 강조하곤 했었다. 그리다가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남긴 건 '이건 여백의 미에요' 라고 우길 수 없다고.


나는 어쩌면 그렇게 시간에 쫓겨 남겨져버린 공백을 '여백'이라 여기고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그림에서 적당한 '여백'을 남기는 것은 무언가를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도 이야기했었다. 그린 곳과 그리지 않은 곳의 균형을 찾아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렇게 주구장창 떠들어댔으면서 정작 나는 일과 휴식의 균형을 찾아나가지 못했던 게 아닐까. 그 결과 이렇게 지쳐버린거고...


무척이나 힘들었던 해에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그렇게 모든 걸 다 쏟아내버리면 오래 가기 힘들다고.. 앞으로 오래오래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면 네가 마음을 잘 다스리고 균형을 잘 잡아야 된다고.


그 때 그 말을 흘려들었던 나는 이렇게 지쳐버렸고, 생각보다 오래 충전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그것을 어디에 쓸지 잘 분배하고 실행시켜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먹을만큼 먹은 나이에 아직도 이런 것에 미숙하다니 나는 그동안 내가 해내야만 하는 너무 외적인 것들에 휘둘려 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좀 더 내밀하게 계획하고 해나갈 수 있도록 내 자신을 믿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


오늘 정말 화창하네.
햇볕 아래 잠깐이라도 산책해보는 게 어때?


내 제안에 일을 해야되기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다며 대꾸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지금을 희생하곤 했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인생이었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항상 쫓기는 듯 불안해보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부지런히 일했던 개미 못지않게 베짱이도 그 달콤한 게으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았을까? 또 명작을 그려낸 화가들 역시 의미있는 공간을 남기기 위해 수백번을 고민하고 연습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해내라는 모토는 '인생의 쉼표(숨표)'를 없애버렸다.


이젠 최선을 다해 쉬고
게을러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빨래를 널다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