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의 무게감
어렸을때 보았던 만화 속의 빨간머리앤. 수십년이 흘러버렸지만 내 기억 속의 빨간머리앤은 구박도, 사랑도 많이 받아서 늘 웃고 울었던 어린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빨간머리앤의 만화 주제가의 가사 그대로였다. 넷플릭스의 미드(정확히는 캐나다 드라마) 빨간머리 앤(Anne with an E)를 보기 전까지는. 사실 내가 어릴때 보았던 만화 빨간머리앤은 전체 원작 수권 중에 겨우 1권에 해당할 뿐이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간 머리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가슴에 솟아나는 아름다운 꿈 하늘엔 뭉게구름 퍼져나가네 빨간 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간 머리 앤 우리의 친구 빨간 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간 머리 앤 우리의 친구 - 빨간머리 만화 주제가 -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딱 이 모습 그대로였던 빨간머리앤은 넷플릭스를 보는 동안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갔다. 이제서야 뒤늦게 루시모드 몽고메리 작가의 원작 그대로 빨간머리앤을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잊을만하면 다시 새로운 시리즈로 리메이크 되고 그 인기는 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또 다시 불러 일으키고.... 이런 반복되는 흐름이 바로 오랜 세월동안 사랑받는 고전의 매력이자 힘이겠지.
넷플릭스의 빨간머리 앤에는 그 시대의 모든 갈등들이 나온다. 페미니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 여성 권리의 침해, 캐나다 원주민에 대한 학대, 빈부격차, 남성우월주의 등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사회 갈등이 담겨 있다. 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갈등들의 민낯을 고스란히 어른의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어른의, 마음으로 보았고 때로는 빨강머리앤을의 시대적 갈등은 마음 깊이 잠자고 있던 분노를 깨우기도 했다. 그저 역경을 헤쳐 나가던 용감하고 사랑스럽기만 했던 빨강머리앤은 사라졌지만 갈등에 맞서 울고 웃는. 강하지만 여전히 위태로워 보이는 앤이 내 기억에 자리 잡게 되었다.
앤은 책을 많이 읽었고 책으로 인생을 배우는 감수성 풍부한 소녀이다. 슬픔도, 기쁨도 남들 보다 더 많이 느끼는것 같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더 많이 공감하여 더 많이 슬프고 더 많이 기뻐 보인다. 앤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사회 갈등에 마음이 아팠고, 그럼에도 희망으로 갈등이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 덜 보고 조금 덜 느끼고 조금 덜 알았다면 어땠을까. 남들만큼만 공감하고 느꼈다면 어땠을까. 너무 많이 알아 버렸고, 또 너무 많이 보고 배워서 앤은 슬픔이 많다. 그만큼 기쁨도 많겠지만 사랑 받지 못한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늘 삶이 위태로워 보였고, 갈등이 내재되어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 조마했다.
어린시절의 아픔은 영원히 해결되지 못하는, 해결된듯 보여도 마음 깊속이 잠자고 있을뿐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에 눈물의 포인트가 아님에도 눈물 흘리면서 정주행 끝! 시즌3으로 종영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아직 해결 되지 못한 사회적 갈등들이 너무 많이 남았고 이제 앤도 그것을 알아버렸는데... 앤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것만 같은데.
더 이상 넷플릭스의 앤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
감사하게도 원작을 읽고 싶다는 설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