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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1. 2021

쉬야 난리블루스

조카 율이를 위한 짧은 기록




그놈의 '쉬야'가 세 살배기 조카 율이를 곤혹스럽게 한 건 요 근래다.


율이 할머니인 엄마는 여름 나절부터 이제는 율이가 기저귀를 떼고 쉬야를 가릴 때라며 부쩍 성화셨다. 사람이 언제 기저귀를 떼고 첫 쉬야를 하는지 잘 몰랐던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율이의 지극한 기저귀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치 지순한 데가 있어서 언젠가 기저귀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그렇게 솟구치나 보다. 그리하여 율이는 좀처럼 기저귀에 작별을 고하지 못한 채 가을을 맞았다.

 

가을에 접어들 무렵, 율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바야흐로 꼬맹이 반 원생들의 ‘쉬야’ 연습에 들어갔다. 2월생인 율이는 그중에서도 말이 제법 빠르고 의젓해 모든 이들 - 선생님과 부모와 조부모와 어쩌면 고모인 나까지 - 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가장 먼저 기저귀를 떼고 보란 듯이 어린이집 ‘공룡 변기’에 앉을 줄 알았던 율이는 그러나 웬걸! 온갖 핑계를 다 대며 자신이 변기에 도저히 앉을 수 없는 이유들을 줄줄이 읊었다. 변기는 무섭고, 변기는 싫고, 변기는 불편하고, 변기는 또 어떻고……. 일단 무엇보다 기저귀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변기의 ‘변’ 자만 들어도 움찔하며 단호하게 ‘싫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쌩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날은 어린이집 선생님이 율이한테 누구는 벌써 기저귀를 떼었고, 누구도 변기에 앉아 쉬야까지 잘한다고 했더니 율이의 반격이 가히 장관이었다고. 누구도 아직 기저귀 했고, 누구도 아직 변기에 쉬야할 줄 모른다고 손을 꼽아가며 야무지게도 말하더란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들로 골머리를 앓던 율이 엄마와 아빠. 고민 끝에 그들은 모유 수유 끊을 때의 비법을 다시 도입해 보기로 결심했다. 바로 냉장고에 율이가 좋아하는 ‘곰돌이’ 스티커 열네 개를 붙여 2주간 작별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하루에 하나씩 스티커를 떼며 곰돌이가 기저귀 가져갈 날을 함께 준비하고 헤아려 보는 것이라나? 율이는 스티커를 뗄 때는 그렇게도 즐거워하며 곰돌이가 기저귀를 가져갈 거라고 잘만 이야기하더니 그것은 역시나 이론이었는지. 실전으로 기저귀에 작별을 고해야 하는 날이 오자 난리가 났다.

 

얘, 율이가 벌써 바지에 쉬야를 일곱 번이나 해서 늬 오빠가 새 내복 사러 뛰어갔다 왔단다.

 

어느 평화로운 주말, 오빠네 소식을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영 침울했다. 원, 금방 가릴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니. 엄마는 내게 넌지시 오가는 길에 한번 들러 율이 기분도 풀어 주고 응원도 해 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럼, 그럴까요? 율이가 좀 어떤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그날 바로 슬쩍 들러 보았다. 율이는 내가 머물던 점심과 저녁을 거쳐 세 번 바지에 쉬야를 했고, 변기에 앉는 것은 여전히 싫다고 했다. 그중 한 번은 실컷 낮잠을 자던 중 했는데 어찌나 폭 젖었는지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서도 내내 눈물을 찔끔거렸다. 나는 율이 눈치를 살살 보다가 아까 몰래 사 들고 온 빵 봉지를 얼른 꺼내 왔다.

 

율아, 고모가 맛있는 빵 사 왔어.

어머나! 율아, 고모가 롤 빵 사 오셨네! 율이가 먹고 싶다고 하던 똑똑 빵집의 롤 빵이야!

 

언니의 말에 똑똑 빵집이 뭔지도 모르면서 분위기를 띄우느라 나도 덩달아 우와아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금세 그치고 아이는 벙글 웃으며 양손 가득 빵을 쥐었다. 그러면서도 쉬야는 하고 싶지 않고, 변기도 싫다고 끝내 도리질이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 됐기도 했다. 당최 그놈의 쉬야가 뭐기에 온 가족이 이렇게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그날 나는 결국 율이가 유아용 변기에 쉬야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무렵 오빠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무슨 일인가 보니, 율이의 첫 쉬야 성공 소식이었다. 변기에 쉬야를 잘하면 아빠는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할머니는 젤리를 사 주실 거라고 온갖 감언이설로 율이를 꼬드겨 간신히 첫 성공을 거두었다나! 교육학 전공자로서 먹을 것을 보상으로 내 걸어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은 그다지 추천할 만한 방법이 아니다! 라고 교육심리학 노트에 끼적였던 기억 따위는 저 멀리 우주로 슝 날려 버리고 얼른 전화를 걸어 온갖 칭찬과 함께 율이를 구슬렸다. 지금처럼만 잘하면 고모가 색색가지 케이크를 사 가겠다고 약속! 율이의 쉬야를 둘러싼 길고 긴 전쟁이 처음으로 휴전에 들어간 날이었다.




먼 훗날 율이는 이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 나는 모르는 일이네 발뺌하거나 아, 고모는 뭐 그런 걸 기록으로 남겨 놓아서 창피하게 하냐고 원성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록이랄지 추억이랄지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나는 기억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누군가가, 바로 어제 일처럼 당시를 꺼내 보여주면 당사자는 얼굴도 좀 달아오르고, 부끄럽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또 살짝 그리운 마음이 들어서 계속 더 이야기해 보라고, 들려 달라고 괜히 조르기도 하는 것. 그리하여 율이가 드디어 해낸 첫 쉬야의 기록을, 그 난리블루스를 잊기 전에 성글게나마 남겨 본다. 여기에 못다 적은 내용이 실은 더 재밌지.

 

결혼하고 나서는 좀처럼 뛰는 일 없던 제 아빠가 바람같이 달려가 사 온 파란색 새 내복이 사실은 내후년에나 입으면 좋을 커다란 것이어서 입히고 나니 무릎 부분에 자글자글 주름이 졌다거나. 변기에 앉기 싫다는 너를 데리고 고모가 세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어른은 왕 변기, 아기는 미니 변기에 앉아서 쉬야를 하는 것이라고 앉았다 일어섰다 시범을 보인 일이나. 그러다 쉬야 신호를 개발하면 어떨까 해서 너더러 고모 배를 꾹꾹 두 번 누르면 고모는 쉬야하러 화장실 갈 거라고 계속 누르게 시키고, 마렵지도 않은 쉬야를 하는 척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나온 일이나. 아니면, 자꾸만 떼를 부리는 너를 달래려고 고모가 신데렐라 이야기를 목청껏 읽고 엄마는 옆에서 박수를 치며 추임새를 넣은 일이나. 심지어 그 책은 네 아빠가 재활용장에서 발견한 일본어 책이라 뭐가 뭔지도 모르고 대충 눈치로 읽어주었지.

 

이렇게 모든 아이는, 어린 날의 어떤 부분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생략된 채 어른이 된다.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은 늘 희미하기만 한데, 그 희미함 너머에 있는 것은 더욱 감감해서 누군가가 거들어 주지 않으면 좀처럼 살아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훗날 다 자란 율이도, 처음부터 혼자 걷고 혼자 말하고 혼자 먹고 혼자 입은 것처럼 씩씩하게 잘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 뭔가가 잘 안 되고, 실망스럽고 지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날이 있다면 그때 이 쉬야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않았던 공갈 젖꼭지를, 젖병을, 기저귀를 하나씩 떠나보내며 사실은 벌써부터 어떤 힘든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연습을 착실히도 해 온 너였음을. 난생처음으로 폭 빠져 버린 익숙한 것들을 떠나보내는 일은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이었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적응해 온 너였음을. 그러니까, 그 모든 '시작의 순간'들은 어마어마한 사건이고 작은 독립이다. 혼자 젖병을 잡고, 혼자 물컵을 들고, 혼자 걷고, 혼자 쉬야를 하고, 혼자 옷을 입고, 혼자 젓가락질을 하고. 지금은 네가 밥 먹는 식탁에 적게는 한 명, 많게는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지만 머지않은 시기에 혼자 있을 줄도 알게 되겠지. 가끔은 그걸 즐기고 그리워하게도 될 것이고.

 

도움받던 그 무언가를 하나하나 떼어 낸다는 것은 굉장히 아프고 쓰린 경험이지만 괜찮을 거다. 왜냐면 넌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고 보면 신기하지. 딱 그 무렵 이후부터 기억이라는 놈은 시작되니까. 그렇게나 울고 떼쓰며 세상이 무너져라 슬퍼했던 기억을 잠자코 깊숙이 묻어준다는 것은 하나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고모가 좀 얄궂게도 느껴진다. 그런데 이 고모도 - 글쎄 얼마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 꼭 너만 할 때 ‘기린 변기’에 앉아 줄창 쉬야 연습을 했단다. 고모도 울기도 많이 울고 실수도 많이 해서 할머니를 괴롭혔다고 하니 놀랍지? 이렇게 젠체하며 살아가는 어른들도 사실은 다, 모두가 다 혼자 쉬야를 하게 되기까지 수많은 실수를 거쳤단다. 어때? 그런 생각을 하면 용기가 좀 나지? 이 글을 몰래 숨겨 두었다가 한 십 년 후에 보여주면 어떨까. 그맘때면 사춘기라 문 콩! 닫고 들어가서 시위하려나.

 

그럼 그때 네 눈치 좀 보고, 오픈하든지 묻어두든지 하자. 아무튼 율아, 너의 첫 쉬야 성공을 정말정말 축하한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응가야. 잘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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