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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1. 2021

마음껏 마음대로 마음을 다해

2020년 9월


"탁! 탁!"


그녀는 어깨 뒤로 손을 뻗어 몇 번이나 탁탁 털어댔다.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시폰 블라우스 깃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하늘하늘 춤추듯 펄럭였다. 고개를 틀어 제 어깻죽지를 바라보는 눈길에 짜증과 분노가 섞여 있다. 바로 뒤에 서 있던 나는 조금 무안해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원인 제공자가 나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저 마스크 속에서 한숨을 한 번 쉬었을 뿐이다.


출근길이었고, 여느 때처럼 지하철 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촘촘히 어깨를 겹치고 선 사람들. 마스크 속에 숨어 눈만 내놓은 사람들이, 차마 멈추지 못하고 뒤엉켜 걷는 풍경은 하나의 커다란 병동을 보는 듯하다. 원래 사람이란 조금씩은 아픈 존재들이 아닌가. 저마다 사정들은 달라도 어딘가가 조금씩 이지러진 채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나도 모르게 휴우- 하고 한숨을 내뱉고 만 것인데,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녀에게는 그게 무척이나 꺼림칙하고 기분 나쁜 일이었나 보다. 그럴 수 있다. 나라도, 어쩌면 그럴 수 있었겠다. 벌써 얼마나 되었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이, 서로의 숨이, 잠재적 바이러스로 치환되어 읽히기 시작한 지가.


지하철 문이 열리고 그녀가 후다닥 내렸다. 사람들에 뒤엉켜 멀리 가지 못하는 발걸음이 마냥 갈팡질팡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어깨 쪽을 두어 번 더 터는 것을 보면, 그녀 역시 이 지하세계를 커다란 병동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 병동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병의 이름은 과연 무엇인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먹먹히 바라보다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이라는 병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심'을 키웠고, 의심은 다시 '불신'을, 불신은 '괴로움'을 그리고 괴로움은 끝내  '슬픔'을 낳았다. 나의 한숨 한 번이, 마스크 속을 맴돌다 사라진 숨 한 번이 어떤 이의 마음을 그토록 할퀴고 지나갈 줄이야. 말과 숨이라. 말과 숨이 칼과 송곳이 되어 서로를 위협하고 할퀴고 있구나.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살아있는 한 멈추기 어려울 숨들과, 살아가는 한 오래도록 의지할 말들을 어디에 어떻게 숨겨 두어야 하나. 마음껏 마음대로 마음을 다해 숨을 내뱉고 말을 전하던 시절이 아주 오래전 일인 양 까마득하다.


마음껏 마음대로 마음을 다해. 마음껏 마음대로 마음을 다해. 마음껏 마음대로 마음을 다해.


그날 하루 종일 나는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이 말을 중얼거렸다. 마음껏 마음대로 마음을 다해 중얼거렸는데도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마스크 속에 숨은 내 숨과 내 말들의 탓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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