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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1. 2021

아무런 쓸모 좀 없으면 어떤가

2020년 9월


가쁘게 차오르던 숫자가 가뿐해졌다. 가을이 오고야 만 것이다.


어렸던 시절에는 여름의 마지막 날이라거나 가을의 첫날 같은, 생각해 보면 아무 날도 아닌 날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기념하곤 했다. 어쩌면 어린 날의 날들은 저마다 다른 이름과 얼굴로 제각각 기념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매일이 기념일이었던 셈이다. 나는 제법 크고 나서도 이런 습관을 버리지 못해 어느 날 자정에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8월 31일에서 9월 1일로 넘어가는 밤이었다.            


오늘 밤부터 가을밤이다. 찌르르 우는 풀벌레들도 오늘 밤부터 가을을 노래하는 것이다.  


가을을 노래하거나 말거나 살다 보면 새로운 달의 첫 번째 날 쯤은 훌렁 지나가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라고 중얼거리다 문득 멈추어 본다. 새로운 날들을 기념하고 아무 날도 아닌 날들에 이름을 붙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딱히 쓸모는 없지만 하루를 마감하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때 제법 기운을 주던 습관을 내팽개쳐 버릴 정도로 더 훌륭하고 쓸모 있는 일을 찾은 것인가, 나는?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럴 리가 있었다면 나는 오늘 시간을 들여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어른들은 어린 시절의 습관들을 하나하나 놓아 버리거나 놓쳐 버리면서 조금씩 무거워지고 불행해지는 것 같다. 그 습관들이란 어른들이 보기엔 하등 쓸모없고 필요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이를 테면, 어쩌다 뿌리 뽑힌 작은 풀잎 하나를 흙더미에 묻고 삐죽한 나뭇가지를 주워 흙 꼭대기에 조심조심 꽂아 놓는 일이라거나, 제자리에 잘 있는 민들레 홀씨를 굳이 호호 불어 더 좋은 땅으로 보내 주려 애쓰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놓아 버리고 털어 버리는데 무거워지고 불행해지다니. 어린 날의 마음이 가벼운 것은 어쩌면 쓸모없고 필요 없는 일이 주는 투명하고 솔직한 기쁨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실실대고 깔깔대면서 마음이 한껏 가벼워지듯. 가끔은 그런 순간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매 순간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는 것은 아무 날도 아닌 날들이 사실은 아무 날이었고, 아닌 게 아니라 지극히 중요한 날이었음을 태생적으로 알기 때문은 아닐까. 에너지가 방전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야 스르륵 누워 잠드는 아이들의 삶이란 그만큼 꽤나 투명하고 솔직하다.


한편, 어른들의 삶이란 뭐랄까. 에너지가 방전되었는지 아닌지 내가 아픈지 어떤지 제대로 들여다볼 새도 없이 시간의 꽁무니를 좇아 미친 듯이 뛰어가고만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누가 출발조차 못했는지, 누가 길을 잃었는지, 누가 넘어졌는지 누가 누구이고 나는 또 누구인지 알 새가 없다. 꽤나 모호하고 솔직하지 못하다.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냥 좀 더 솔직하게 이런저런 쓸모를 따지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쓸모없는 일들에 골몰했던 좀 더 어렸던 날들의 나를 너무 미워하지도 또 너무 사랑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오후 다섯 시 정도의 적당한 온도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쓸모 좀 없으면 어떤가.

아무런 쓸모 좀 없으면 어떤가.

아무 날도 아니면 어떤가.


그리하여, 아무 날도 아닌 날에 기어코 몇 자를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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