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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Dec 29. 2023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느 순간'에

불현듯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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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이던 어느 여름, 수영에 꽂혀 한 일 년 정도를 열심히 배웠다. 그러고 보니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처럼 나도 주기적으로 어딘가에 꽂힌 채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수영에 꽂힌 그 해에는 수영 생각만 해도 신이 나고 수영장 가는 날에는 기분이 좋아 집으로 날아오곤 했다. 강추위로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날에도 기어코 수영장에 가 몇 바퀴를 돌고 왔으니 그때만큼은 수영에 진심이었나 보다. (지금은 아니란 소리) 수영이 다 뭔가. 수영복도 없다. 그래도 접영까지 했으니 다시 시작하면 자유형이나 배영 정도는 기억이 날까? 봄이 오면, 수영에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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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근력 운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 무게가 가벼워졌음을 깨달았다. 분명 늘 하던 대로 지난주와 똑같은 무게를 놓고 했는데 별로 힘들지가 않았던 것. 어라? 싶어서 눈금을 재차 체크했는데 잘못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무게를 하나 더 늘려 보니 그제야 하중이 제대로 걸렸다. 오호, 그럼 조금 나아진 건가? 확실히 예전에 비해 근력이 붙긴 했다. 3월에 인바디를 했을 때에는 근력이 표준 미달이었는데 지난주 다시 해 본 결과 가까스로 표준에 들어왔다. 함께 운동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전하니 축하 세례. 이렇게 미약한 발전에도 같이 기뻐해 주는 <운동은 귀찮지만 하고 나면 좋아 클럽> 사랑합니다. (방금 막 지은 이름)


그러면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느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는 건지, 뭐 제대로 되고는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한 시간들. 수영이 그랬고 헬스도 그렇고 글을 쓰는 일도 그랬다. 뭔가 하고는 있는데 이렇다 할 눈에 보이는 결과도 없고, 남들은 저만치 쭉쭉 앞서 나가고만 있는 것 같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계속해서 해 나갈 수 있을까. 길이나 마음을 잃지 않고.


답은 뻔하다. 그냥 될 거라고, 좋아질 거라고 믿고 계속해서 하는 수밖에. 그렇지만 인간이기에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조급해지기가 쉬운 것이다. 수영이 그랬다. 원래 물을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우연히 발을 들이게 됐는데 막상 해 보니 재미있었다. 다만,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를 않아서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물에 뜨는 건 금방이었는데 호흡이 잘 안 됐다. 팔 동작에 신경을 쓰면 호흡이 안 되고 호흡에 신경을 쓰면 몸이 가라앉았다. 다시 몸을 띄우면 팔이 부자연스럽고 팔에 집중하면 호흡이 망가지는 악순환을 겪다가 에잇! 관둘까! 하는 생각이 수십 번 들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수영이 되기 시작했다. 팔을 착착 돌리고 음파- 음파- 하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이럴 수가 있나?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엉망진창이었는데? 이렇게 0이었다가 갑자기 100이 될 수가 있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0이었다가 100이 된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가 갑자기 해내게 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명백한 오류였다. 나는 0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0이 아니었을 것이다. 98이었고, 99였고 그러다 '어느 순간' 100이 된 것. 또한 내 생각만큼 엉망진창도 아니었을 것이다. 좀 삐걱대고 어설프기는 했어도 아주 조금씩 미약하게나마 나아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다 '어느 순간' 불현듯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내 생각만큼 별로이거나 엉망진창인 상태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오늘 열심히 근력 운동을 하며 다시금 했다. 하여튼 나에게 제일 못 되게 구는 사람은 따로 있다. 거울 너머의 나를 보는데 조금 미안한 마음. 앞으로도 나와 살아야 하는데 서로 좀 잘해 주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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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올해도 사흘 정도만 남겨 두고 있다. 좋은 한 해였다. '좋다'의 기준만큼 희미하고 추상적인 것도 없겠지만 내게 2023년은 참 좋은 한 해였다. 잘 된 것도 있고 아닌 것들도 많지만 어쨌든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새로운 인연들이 이어졌다. 좋은 사람들이 '우리 오래 인연을 이어가요.'라고 말해 올 때 아주 환한 햇빛을 끌어안은 듯하다. 그런 마음으로 남은 날들을 살아야지, 하고 다짐해 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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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율이가 어젯밤 갑자기 휴대폰 메시지로 하트를 열세 개나 보내왔다. 휴대폰에 있는 건 다 보냈나 보다. 아낌없이, 남겨 두지 않고 표현하는 아이의 마음을 기억해야겠다.


아낌없이, 남겨 두지 않고 오늘 이 하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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