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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Feb 02. 2024

노플랜주의자의 무작정 시즈오카 (끝)

2024년 1월 24일-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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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한 하루 보내고 계신지요. 아침에 포근한데다 날이 쾌청하다는 말을 듣고 야심차게 산책을 나갔는데요. 흐리고 뿌옇고 추웠습니다. 아직은 겨울인 거죠. 그대로 헬스장으로 직행해 좀 뛰다가 왔습니다. 3월에 마라톤이 있는데 진도가 지지부진하네요. 하지만, 아무튼 어제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달렸습니다.


<십각관의 살인>은 다 읽었구요. 정말 결말을 보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반전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생각. 또 엊그제 밤에는 영화 <중경삼림>을 다시 봤습니다. 명작은 시간 속에서도 살아남는 법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요새 그런 말이 있던데요. '명작'은 결말을 알고서도 다시 찾는 법이라고. 결말을 알고서도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란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지요. 그런 작품을 한번 써 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요 몇 년의 삶을 이어 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시즈오카 이야기는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네 편 정도로도 충분한 것 같아서요. 그럼 마지막 이야기 시작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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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을 다녀오니 이번 여행은 이것으로 족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후지산이 일순위는 아니었는데 보고 나니 가장 강렬하게 자리잡아 버렸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들이 많지요. 제가 제 책 <배움의 배신>에도 썼던 것 같은데, 여행과 배움은 그런 면에서 닮은 데가 있습니다. 제가 제 책 <배움의 배신>에도 썼던 것 같은데, 여행과 배움은 그런 면에서 닮은 데가 있습니다.


무엇을 보겠다, 무엇을 배우겠다 그런 마음을 품고 떠나도, 정작 배우거나 보고 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일 때가 많지요. 심지어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게 될지 전혀 무감한 상태에서 떠나는 때도 종종 있습니다. 기대와 달라서 실망하거나 예상치 못한 일들로 고통받기도 하지만 그럴 때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죽을 때까지 자라고, 죽는 순간까지 성장하는 삶이란. 글쎄요. 생각만 해도 좀 피곤하긴 합니다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일도, 어제까지 있었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일도 참 괴롭고 힘들지만- 그런 게 없다면 삶이 너무 공허하고 허무할 것 같기도 하구요. 삶이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해서 살아볼 만하다고 하나 봅니다.


아무튼 그래서 목요일은 다시 시내로 나가 카페에서 시간을 긋고 서점을 둘러보고 맛있는 점심을 먹는 것으로 슬렁슬렁 보냈습니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총 세 군데의 서점을 갔는데요. 지난 글에 <츠타야 서점>에 대해서는 썼고, 나머지 두 곳 이야기를 짤막하게 남겨 보겠습니다. 하나는 시즈오카 역 바로 옆에 있는 '파르쉐'라는 쇼핑몰 5층에 있는 서점 <야지마야>입니다.


이곳은 사실 둘째 날부터 끝 날까지 주구장창 갔는데요. 아마 새로운 곳이 있었으면 그곳을 갔겠지만 못 찾아서요. 서점 두 곳을 돌아가며 매일 들렀습니다. (흡사 지박령)


숙소 옆이라 매일 들렀던 <야지마야> 서점


위 사진에서는 나태주 시인님의 책이 눈에 띕니다. 화려한 띠지가 인상적이었어요. 아이들 책은 여전히 귀엽구요. 서점 이야기 하는 김에 다 해 봅니다. 고후쿠쵸 거리에 있는 <무인양품>에 갔다가 책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기뻐서 뛰어갔지요.

서점에 대한 설명도 무인양품의 느낌이 스며 있네요.

이 책은 참 정말 좋았습니다. <산다> 혹은 <살아간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요? 내용은 잔잔하게 그려집니다.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고 할아버지가 일을 하고 계절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런 하루하루의 모습들이 그림과 글로 표현되는데 말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제 겨우 40년 남짓 살았습니다만, 사는 게 아주 특별하거나 거대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점점 느는 것 같아요. 좋은 걸까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큰 기대 없이도, 강렬한 이벤트 없이도 계속해서 이어져야만 하는 게 삶이니까요. 느릿하게 조금은 소소하게, 행과 불행 그 사이 어디 즈음을 계속해서 걸어나가는 게 삶이 아닌가 요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독립서적 코너

독립서적 코너가 있더라구요. 아, 이건 <무인양품>이 아니라 <야마지야>였던 것 같기도 하구요. 뭔가 뒤엉켜 버렸습니다. 그냥 느낌만 봐 주세요. 작은 출판사들의 발걸음을 구경하는 일은 흥미롭고 참 귀합니다.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에 담아 왔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괴물> 원작 소설들

위 두 책은 반가워서 찍어 보았습니다. 전자는 제가 흥미로워 하는 키워드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메타포가 대단하지요. 후자는 몇 번이나 추천받았지만 아직 보지 못한 영화 <괴물>의 원작입니다. 내친 김에 내일 보러 갈까 봐요. 그러고 보니 내일 제 작품 합평 날인데(소설입니다) 아주 기대가 되면서 걱정입니다. 그래도 쓰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제 작품 읽는 게 재밌더라구요? (예......) 물론, 곤욕이지만 재밌습니다. (고통을 즐기는 타입) 일단 뭐, 쓰면서라도 즐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읽어 주시는 분들도 재미있게 보아 주셨으면 하는 아주 작은... 실낱같은... 희망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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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지막 날 밤이 저물어 갔습니다. 아! 중요한 맛집 이야기를 깜박했군요. 추천받은 초 맛집이 있었습니다. <시미즈코 미나미>라고 참치 덮밥 전문점인데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오전 10시 오픈인데 대략 한 시간 전부터 줄을 선다는 겁니다. 아무거나 다 맛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 오픈런이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또 예외란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과감하게 이날 오전에 오픈런을 감행합니다. 한 10시 29분 즈음 갔나 봅니다. (쓸데없는 디테일) 아니, 그런데 이날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랬는지 문 앞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럼 오예! 하고 얼른 달려가서 서야 하는데 저 같은 내향인에게는 또 수줍음이라는 게 있잖아요. (예??) 그래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두 명이 생겨서 세 번째로 들어갔다 뭐 그런 말씀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길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저.


참치 덮밥 무척 맛있었구요. 한 가지 에피소드는! 제 옆에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한 명 앉았는데 자리가 촘촘해서 제법 붙어 앉게 됐습니다. (벽 보고 앉는 1인석) 최대한 피해 안 끼치려고 벽에 바짝 붙어서 와구와구 먹고 있는데(제 음식이 먼저 나와서) 이윽고 그쪽 음식도 나왔습니다. 학생은 보던 책을 덮고 경건하게 세팅을 하더니 나무젓가락을 뜯었는데 그게 그만 피융! 하면서 제 자리로 날아와 꽂혔습니다. 다행히 밥에 꽂히지는 않고(큰일날 뻔) 그릇에 부딪혀 떨어졌습니다. 서로 엄청 당황...!


고... 고멘나사이!!!

아! 다이조부데쓰!!!


사라졌나 싶었던 생존 일본어를 잠깐 구사해 주고 다행히 무탈하게 잘 먹고 나왔습니다. 비주얼은 대략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제가 시킨 메뉴를 잊어버렸는데 특선이었습니다. 대부분 이걸로 시키는 것 같더라구요. 맛있었습니다!

참치 덮밥(마구로동)

그러고 나서 서점을 또 돌고, 거리 구경을 하고 기력이 다해 숙소로 돌아와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잤습니다. 이때 잠시 꿈을 꾸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꿈에서도 어쩐지 일본에 있었습니다. 멀리서 어떤 남자분이 저를 보고 한국어로 '저 아세요?' 해서(시비 거는 투 아님) 연예인인 줄 알고 일단 아는 척을 했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왠지 상처받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모른다고 했어야 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말도 안 되게 '조... 조인성 씨는 아니시죠?' 이러면서 대충 얼버무리는 꿈을 꾸다가 깼습니다. 예, 맞습니다. Dog꿈이죠. 갑자기 소환된 조인성 씨 죄송하구요. 그냥 '모를 땐 모른다고 하자'라는 교훈(?)을 얻고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래 사진은 지나다가 한글이 예뻐서 그리고 커피 한 잔 하러 들어갔다가 찍었습니다. 도토루 커피가 한국에도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좋아해서 자주 사 마셨거든요. 사라져서 슬픕니다. 그래서 보이면 한 번씩은 들르는 편이에요.

예쁜 한글과 커피 한 잔
생각나는 친구가 있어서요. 밥이, 잘 있었네. 우리도 그래.

스폰지밥을 너무너무 좋아하던 친구가 있습니다. 저희는 늘 '밥이'라고 불렀습니다. 밥이도, 친구의 안부도 무척 궁금하던 때에 불현듯 만나 한참 동안 이 앞에 서 있었습니다. 꺼내어 안아도 보고요. 안부도 물었습니다. 여전하구나. 다행이야, 여전해서.


잘 있지?

우리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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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귀국했습니다. 저녁 비행기이긴 했지만 조급증이 있어서 일찌감치 공항으로 내달렸습니다. 숙소 근처에 바로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올 때와 똑같이 1,100엔 주고 탔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못 탈 수도 있다고 해서 30분 전부터 나가서 기다렸더니 1등으로 승차했습니다. (이런 것만 1등) 그런데 비행기가 지연되어서 공항에 한 4시간 넘게 죽치고 있었네요. 작고 귀여운 공항이라 무척 심심했습니다. 그래서 몇 곳 없는 면세점도 괜히 한 번 더 다녀오고 서점 발견해서 여러 번 구경갔습니다.

공항 서점과 빈자리들(텅 비었던 자리가 나중에는 꽉 찼습니다.)
멀리 후지산이 보여서 찍어 봤습니다. 안녕.

이렇게 4박 5일간의 시즈오카 여행을 마쳤습니다. 무작정 떠난 곳이었지만 생각도 많이 하고 글도 쓰고 참 좋았습니다. 20년 정도 흐르면 그때는 어디에서 어떤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보게 될까요? 2044년이라니 지금은 감이 잘 안 오는데 그때가 되면 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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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진을 남겨 봅니다.


숙소를 정리하고 나오기 전 며칠 동안 안식처가 되어준 책상에 안녕을 고하며 찍은 사진 한 장. 그리고 홍콩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여행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어디인지 모를 길을 또 휘적휘적 걸어가 보아야죠. 제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됩니다만, 걱정은 가만히 내려 놓고 기대감을 안고 살아가려 합니다.


살아야죠. 끝까지.

남은 자의 몫을 다하는 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모두 오늘도 평안하세요.

어딘가로, 오늘도 내일도 끝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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