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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7. 2021

매일이 그렇듯 우리는 오늘도

지혜 개인전 <매일이 그렇듯>에 관한 짧은 기록



지난 3월, 지혜 작가님의 개인전 <매일이 그렇듯_A day like any other day>에 다녀왔다.


작가님은, 내가 아직 작가님을 모를 적에 ㅂ들 책을 들고 북 토크에 와 주셨었다. 나는 그게 참 고마웠다. 아직 만난 적 없는, 낯설기만 한 사람의 시간에 선뜻 자신의 시간을 겹치고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내주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오래도록 고마웠다. 2018년 6월, 해가 그제보다 어제, 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더 길어지던 초여름 저녁이었다.


2월 중순부터 시작된 전시는 14일이 마지막이었다. 인스타를 안 하는지라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들어가 본 날 작가님의 개인전 소식을 들었다. 전시 소개글이 마음을 지그시 눌렀다. 정말, 우리의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전시 포스터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긴 계단 끝 위에 올라 있는 사람은 작가님 자신일까. '매일이 그렇듯' 일상에 쫓기다가 용기를 내어 신청했다. 장소는 성북동. 사전 예약제라 방문 시간은 오후 2시로 했다.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거닐다 올 생각으로.



전시를 준비해 본 적은 없지만, 책을 쓰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게 시공간을 구성한다. 짐작해 둔 동선은 있지만 전시에 따라 자유롭게 거닐 수도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독자에 따라 자유롭게 펼쳐 읽을 수 있는 책처럼 말이다. 작가님의 전시가 그랬다. 작가님의 '매일'이 아늑한 하나의 공간에 고요하고 단정하게 펼쳐져 있다. 리셉션을 지나 제일 먼저 침실 안 침대 위에 앉았다. 흰 벽에 낮달처럼 뜨는 영상을 보았다. 전시 소개글이 영상과 소리를 만나 애틋하게 흘러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짐작해 둔 동선의 반대로 거닌 것 같다. 앞마당을 지나 거실과 큰 방을 건너 화장실도 들렀다가 다락방에도 오르고 침실에서 오래 머물렀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랬어야' 하는 전시는 없겠지. 우리들의 매일이 그렇듯, 그랬어야 하는 '매일'도 없겠다.


나는 작가님의 시간과 내 시간을 천천히 겹치며 나만의 동선을 그렸다. 침실에서 오래 머물다 스르르 일어나 방명록에서 작은 글귀들을 쓴다. 탁자 위에 놓인 진저 레몬티에 오래 눈길을 주고, 거실에 눌러앉아 작가님의 사진첩들을 몰래몰래 훔쳐본다. 이번에는 다락방 커튼 속에 숨어 작가님의 휴대전화에 기록된 언제일지 모르는 시간들을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읽어 본다. 다시 스윽 나와 앞마당 쪽으로 건너간다. 벽면에 자리한 우편함에 '매일'이 빼곡하다. 우편물들을 하나씩 꺼내어 펼쳐 본다. 읽는 동안, 잠시 어떤 기억들 속을 다녀온다. 그곳은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접힌 선을 따라 다시 종이를 접고 봉투에 넣어 조심스레 꽂는다.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낸 기억이 아득하다.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오랜만에 연필을 꾹꾹 눌러 편지를 쓰고 싶다.

영이 보아라, 로 이어지는 글을 쓰고 싶다. 흑연 가루도 조금씩 날리고, 틀린 글씨는 지우개로 북북 지우기도 하며 그러다 조금은 거뭇해져 괜찮을까 다시 쓸까 가늠도 해 보며 말이다. 그러다 에잇 보내자, 마음먹고 우표 한 장을 고르고 골라 곱게 떼어 풀 발라 붙이고 몇 번이고 들여다보다가 품에 안고 뛰어가는 일. 우체통은 어느 즈음에 서 있는 걸까. 알록달록하고 묘하게 도톰한 종이의 질감이 툭, 하고 우편함에 숨어 있을 때의 기분을 마지막으로 느낀 게 언제였더라.


아무래도 오늘은 편지를 써야겠다. 서걱이는 연필로, 거뭇하게 묻어나는 글자들을 따라 기쁘고 슬픈 곳에 닿아, 다다른 곳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야겠다.


전시에 자리한 사진첩들 가운데 오래 마음에 남은 것 두 가지.


어머님의 손글씨일까. 작은 메모 모음.

딸의 끼니가 걱정되어 바쁘게 나가는 도중에도 잊지 않고 남겨 주신 마음들. 국하고 먹어, 볶아 먹어, 같이 먹으렴... 마지막 장에는 어린 날의 지혜가 어머님과 신나게 눈썰매를 타는 사진이 있었다. 어린 날의 지혜. 그냥 이렇게 불러보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풍경을 찍은 사진들.

못도 있고, 연꽃도 있고 나는 어디인지 모를 시간들이 그윽하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작가님이 연필로 써 내려간 기록들. 사진 뒤에는 사진을 찍는 동안 뒤에서 기다려 준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다. 그래, 우리는 말을 하다가도 어떤 풍경을 만나면 잠시 침묵 속에서 사진을 찍지. 숨을 죽이고, 고요한 가운데. 사진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럴 때마다 서너 걸음 뒤에서, 잠시 멈추어 선 시간 속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함께 기다려 주었던 사람들. 사진을 찍으면 사진 속의 시간만 멈추어 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함께 멈추어 서서 기다려 준 사람들이 있구나. 섬세한 시각에 감탄하며 오래 들여다보았다.



지혜 작가님, 하면 연필이 떠오른다.

2018년 가을에 언리미티드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이야기하고 사람을 만나며 그때마다 작가님 곁에 머물던 연필들과 흐릿한 듯 분명했던 연필선을 기억한다. 바로 깎아내어 뾰족하게 솟아오른 연필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한참 써 내려 간 끝에, 혹은 어떤 그림을 오래 그려 나간 끝에 얼마간 둥그레지고 부드러워진 연필심. 오래 쥐어 따듯할 게 분명한 연필대.   


방명록 책상에서 지혜 작가님께 짤막한 편지를 남겼다. 꼭 전시를 보고 나서, 그 시간 한가운데 앉아서 연필로 쓰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왠지 연필이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연필이 있었다. 나는 투명한 불빛 아래 단정히 앉아 둥근 연필로 몇 자를 적어 내려갔다.

 

잠시 멈추어 선 따스했던 시간을, 곁에 두고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어 그날에 대한 짧은 기록을 남겨 본다.  


매일이 그렇듯 우리는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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