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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Oct 01. 2021

사실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오래된 습관의 시작에 관한 짧은 기록


집으로 가는 길목의 마지막에는 우편함이 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엇이 왔나, 오늘은 어떤 소식이 있을까. 대체로 그렇고 그런 고지서들뿐이지만 그래도 어두운 저 편으로 손을 쑥 밀어 넣고 그 안을 유심히 살피는 일에는 왠지 모를 기대와 설렘이 공존한다. 어쩌다 도톰한 편지 봉투나 비스듬히 누운 엽서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제법 높은 층수의 집까지도 달려 올라갈 듯 기쁜 것이다. (물론, 달려 올라간 적은 아직 없다. 마스크만 안 썼더라도, 라고 괜한 핑계를 대 본다.)    


우편함을 돌아보는 습관이 생긴 것은 1995년 봄부터다.

그전까지는 그렇게 자주, 매일같이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얘, 우편함에 뭐 없디? 아, 까먹었다! 에그, 들어올 때마다 보라니깐- 예에, 그럴게요. 그러마 하고 다짐해도 잊어버리기가 일쑤. 어떤 날은 온 가족이 다 같이 사이좋게 잊어버려 우편물이 며칠이고 그대로 머물러 있기도 했다.

1995년 그해 봄, 하면 학교를 한 바퀴 두르고도 남아 담장 밖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던 개나리 군단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얼마나 어여쁜 풍경이었을까.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빽빽한 콩나물처럼 숨 막히게만 보였다.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서 새롭게 맞이하게 된 봄이, 내가 원치 않았던 봄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불-쑥, 와 버렸다 봄이.

그래서 지금도 전학생, 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 한편이 쿠-궁 내려앉는 느낌이다. 떠나고서야 알았다. 실은 내가, 머물던 곳을 아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 친구들의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남도 사투리 억양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 그래, 사실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처음 내려와 살았던 기억나지 않는 봄부터 기억할 수 있는 봄까지 아주 많이 사랑해서, 나는 서울에 오고 몇 해가 지나도록 깊은 향수에 젖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날마다 안달이 났다. 어찌해야 하나.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어 날마다 이런저런 편지를 썼던 것 같다. 나의 친구 R에게, 나의 벗 J에게, 내 짝꿍 D에게... 다들 잘 지내니. 나는 여기가 싫어. 다시 돌아가고 싶어. 보고 싶다. 진짜로 보고 싶다...

- 그러나 답장은 잘 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열둘에서 열셋, 다시 열넷으로 넘어가는 그 산만하고도 활달한 시기에 편지가 웬 말인가. 발에 모터를 단 듯 뛰어다녀도 모자랄 판에 진득하게 앉아서 손편지를 쓰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그냥 내 편지가 답장까지 해 줄 정도로 굉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무튼 말이다. 그렇지만 보낸 사람의 마음은 그게 아닌지라 혹여나 그리운 이름들이 도착해 있을까 싶어 나는,

- 날마다 우편함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왔을까. 오늘은 왔을까. 내일은 올까. 내일은 올까.

그러다 작고 도톰하고 수줍은 편지 봉투라도 발견하는 날이면 기뻐서 한참을 못 열어보고 그저 들고만 있었다. 뜯으면 닳기라도 하는 듯. 

기억에 남는 편지는 보낸 지 한 달 여만에 도착한 J의 것이었는데, 그 아이가 쓴 주소 위에 어른 글씨로 크게 'K구'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J가 쓴 주소에는 'K구'가 빠져 있었다. J와 내가 살던 곳은 구 개념이 없는 곳이라 그런 걸 몰랐을 수도 있고, 내가 주소를 대충 써 주었을 수도 있고. 돌고 돌아 한 달만에 도착한 편지를 보며 반갑기도 했지만 어떻게 내가 사는 K구를 알았을까 싶어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여기 등장하는 J는, 어린 날을 함께 보낸 오랜 친구 '연'이다.
어느 해던가. 여름날에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다시 만난 그녀는 내 오랜 습관을 만들어 준 주인공이자 고마운 친구이다. 헤어질 때는 열 살이 겨우 넘었더랬는데,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어느덧 서른을 넘긴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그날 마주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네 덕분에 우편함을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하니 연이는 깜짝 놀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니. 고마운 거지.

그때부터 나는 절대 우편물들을 잊거나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통해 어린 날의 나처럼,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거나 그리워할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자주 잊고 끝내는 잃어 후회하는, 바보짓을 멈추지 못하지만.

내 오래된 습관의 시작을 따라가다 보니 밤하늘의 어둔 빛이 땅으로 좀 더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제 대기는 좀 더 선선하게 가을바람을 품을 것이다. 그래, 시월이다. 


시월의 눈이 푸르다.

오랜만에 펜을 들어 보고픈 이들에게 자를 적어 보내야겠다. 소식은 손에서 손으로 천천히 전해지며 점차 온기를 더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길목의 마지막 자리에 몰래 숨어 반가운 얼굴을 숨기고 기다릴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어느 순간 불현듯, 우편함이 열리고 환한 빛이 쏟아지고 내가 그리워하는 이의 손에 닿아 따뜻하게 읽힐 것이다. 


몰래 온 편지 한 통이, 불현듯 찾아온 엽서 한 장이 그토록 따뜻한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재빠른 메시지가 다 담지 못하는 온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천히 흐르기에 좋은 계절이다. 편지를 쓰는 틈틈이 하늘을 보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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