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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he Beauty in the World 2

완벽한 고요가 건네는 위로

by 김시연

Tiburcio Pérez y Cuervo (1785/86–1841), the Architect, Goya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Spanish, 1820

Tiburcio Pérez y Cuervo (1785/86–1841), the Architect, Goya

페레스의 느슨하게 말아 올린 소매—회화적으로 뛰어난 표현—와 편안한 표정은, 고야의 거의 단색에 가까운 색조와 결합되어 **건축가 티부르시오 페레스(Tiburcio Pérez)**에 대한 예외적으로 직접적이고 비공식적인 초상화를 만들어낸다.


그보다 1년 전, 고야는 페레스의 삼촌 또한 초상화로 남겼는데, 삼촌 역시 건축가였으며, 해당 초상화는 훨씬 더 위엄 있고 전통적인 형식으로 그려졌다. 현재 이 초상화는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다.


페레스는 마드리드에서 여러 공공 기관 건물의 설계를 담당했으며, 아토차 거리(Calle de Atocha)의 의과대학을 포함한 여러 건축물을 디자인한 인물이었다.


María Teresa (1638–1683), Infanta of Spain, Velázquez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Spanish, 1651–54

스페인 왕녀 마리아 테레사” – 디에고 벨라스케스

Infanta Maria Teresa of Spain” – Diego Velázquez .jpeg María Teresa (1638–1683), Infanta of Spain Velázquez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Spanis


어린 공주의 초상화, 그리고 그녀의 운명


마리아 테레사(1638–1683).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녀.

그러나 그녀는 단순한 왕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유럽의 외교적 도구였고, 권력과 정치 속에서 하나의 연결 고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붓 아래, 고귀한 모습으로 시간 속에 멈추어 있다.


그녀는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다. 금빛이 도는 윤기 있는 머리카락,

아름다운 드레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무겁다. 그것은 단순한 어린 소녀의 눈빛이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운명을 알고 있는 눈빛이다.


벨라스케스의 손길 – 빛과 질감의 마법


벨라스케스는 단순한 궁정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빛을 다루는 마술사였다. 그는 형태를 넘어, 존재 자체를 캔버스에 옮겨 놓았다.


이 그림을 보라.

그녀의 드레스는 무겁고 화려하다.

은빛과 금빛이 섞인 자수,

섬세한 레이스,

벨라스케스의 붓끝에서 실크처럼 빛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이다. 그녀는 어리지만, 그녀의 표정 속에는 감춰진 무언가가 있다.

불안인가?

책임인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인가?


그녀의 눈빛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감정의 기록이다.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 정치적 도구가 된 왕녀


마리아 테레사는 스페인 왕 펠리페 4세(Felipe IV)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한 공주가 아니었다.

그녀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평화를 위한 결혼 동맹의 핵심 인물이었다.


1660년, 그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Louis XIV)와 결혼했다.

그녀는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프랑스 궁정의 새로운 여인이 되어야 했다.

그녀는 유럽의 역사 속에서 ‘태양왕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권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왕비였지만, 루이 14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궁정의 정치는 그녀를 소외시켰고, 그녀의 삶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리고 결국,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스페인을 위해, 프랑스를 위해 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완전한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녀를 바라본다


이제, 우리는 다시 그녀를 바라본다. 벨라스케스의 붓 아래, 그녀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그녀가 단순한 어린 공주가 아니었음을. 그녀의 운명은 화려한 드레스 속에 가려진 무거운 현실이었음을.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묻는다.

“내 삶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했을까?”


벨라스케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녀를 남겨두었다.

빛 속에서,

시간 속에서,

우리의 시선 속에서.


그리고 그녀는, 지금도 살아 있다.




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Johannes Vermeer Dutch, ca. 1662

물주전자를 든 젊은 여자,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창가에 서서, 그녀는 무엇을 보는가?

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Johannes Vermeer Dutch

빛이 들어온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마치 세상이 천천히 깨어나는 순간 같다.


그녀는 창가에 서 있다.

한 손에는 물주전자가 있고,

다른 손으로 창문을 살짝 밀어 올리는 듯하다.

그녀는 막 창을 열려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열어둔 창을 다시 닫으려 하는가?


그녀의 시선은 흐릿하다.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같고,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도 하다.

그녀는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그 순간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페르메이르의 빛 – 현실을 넘어선 순간


페르메이르는 빛을 그리는 화가였다. 그의 붓끝에서 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시간을 멈추게 하는 힘이 된다.


이 그림에서도 빛은 창가에서 부드럽게 흐르며, 젊은 여인의 얼굴과 손, 그리고 그녀가 입은 청색과 금색의 고운 옷감 위에 내려앉는다.


그 빛은 따뜻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감정을 남긴다.

그것은 아침의 빛인가? 아니면 오후의 나른한 순간인가?


페르메이르는 답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우리에게 그 빛을 보게 할 뿐이다.


물주전자의 의미 – 일상과 신비 사이


물주전자.

너무나 평범한 물건. 그러나 페르메이르의 손을 거치면,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고요함을 상징하는 도구가 된다.


그녀는 이제 물을 따르려는 것인가? 그녀는 정결한 아침을 준비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잠시 이 순간을 음미하고 있는 것인가?


페르메이르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한 사람의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단순한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우리가 한 번쯤 지나쳤을,

그러나 다시 돌아보게 되는 순간 그 자체다.


그녀의 시선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녀는 무엇을 꿈꾸는가?


페르메이르는 묻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녀를 그곳에 남겨둔다.

우리에게 답을 찾을 기회를 주면서.


그리고 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우리의 이야기를 만든다.



Allegory of the Catholic Faith, Johannes Vermeer Dutch, ca. 1670–72

“가톨릭 신앙의 우의화”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Allegory of the Catholic Faith Johannes Vermeer Dutch  ca. 1670–72.jpeg Allegory of the Catholic FaithJohannes Vermeer Dutchca. 1670–72, 45 x 35 in. (114.3 x 88.9 cm)

이 그림은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공개적으로 미사가 금지되었던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의 승리를 표현하기 위해 복잡한 우의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림 속 여성 인물은 가톨릭 교회를 상징하며, 한 발을 지구본 위에 올려놓고 있다. 이는 세속적인 것 위에 자리한 교회의 우위를 나타낸다.


전경에서는 교회의 초석이 뱀(악의 상징)을 짓누르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가톨릭 신앙이 악을 정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페르메이르는 결혼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이 그림 속 성작(chalice), 미사경본(missal), 십자가(crucifix)로 가득한 테이블당시 네덜란드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숨은 교회(hidden churches)’의 미사를 암시할 가능성이 크다.


배경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장면은 플랑드르 화가 야코프 요르단스(Jacob Jordaens)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이는 페르메이르의 개인 소장품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Young Woman with a Lute, Johannes Vermeer Dutch, ca. 1662–63

“류트를 든 젊은 여인”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2–63)


Young Woman with a Lute Johannes Vermeer Dutch  ca. 1662–63.jpeg Young Woman with a Lute, Johannes Vermeer Dutch, ca. 1662–63

창가에서, 그녀는 기다린다


한 여인이 창가에 앉아 있다. 현을 맞추며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음악이 주는 순간을 즐기는 것일까?


페르메이르의 캔버스 속에서 그녀는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순간을 살아간다.


음악, 그리고 은밀한 메시지


네덜란드 공화국의 젊은이들에게 음악은 단순한 교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회적인 대화의 수단, 감정을 전하는 도구였다.


류트는 특히 사랑의 상징이었다. 류트를 연주하는 여인은 음악과 함께,

어쩌면 은밀한 메시지를 보내는 중일지도 모른다.


침묵 속의 생동감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 그것은 여인의 피부를 감싸고,

류트의 곡선을 따라 흐르며, 방 안의 공기를 가득 채운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있지만, 빛 속에서 그녀는 살아 있다. 이 순간은 정지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이 흐르기 전의 긴장감, 누군가 도착하기 전의 설렘,

그 모든 것을 담아낸다.


페르메이르는 단순한 정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감정까지도 그렸다.



Study of a Young Woman, Johannes Vermeer Dutch, ca. 1665–67

“젊은 여인의 연구”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5–67)

Study of a Young Woman Johannes Vermeer Dutch  ca. 1665–67.jpeg Study of a Young WomanJohannes Vermeer Dutchca. 1665–67

빛이 머무는 얼굴


그녀는 조용히 우리를 바라본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우리를 보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어딘가 멀고, 깊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부드러운 빛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볼 위에 따뜻한 생명을 부여한다. 입술은 살짝 열린 채, 마치 방금 말을 하려 했던 듯.


그러나 그녀는 침묵한다. 그녀는 그냥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초상화가 아니다.

이것은 트로니(tronie), 즉, 특정한 인물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표정, 빛, 감정, 그리고 신비를 연구한 작품이다.


페르메이르의 또 다른 작품,〈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은 의뢰받아 그린 것이 아니다. 그녀의 이름도, 신분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존재감이다. 그녀가 어떤 순간을 살고 있는지, 그녀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내면을 향한 탐구다.


화려하지 않은 장식 – 그러나 더욱 눈길을 끄는 것


그녀는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지 않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 않다. 그녀의 장식은 단순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에 두른 천, 그녀의 목을 감싸는 황금빛 목도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인들에게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요소였다. 그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상상력의 공간이었다.


페르메이르는 그녀를 어떤 특정한 계층의 여성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를 시간과 사회적 신분을 초월한 존재로 만든다.


그녀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그녀는 누구도 될 수 있고, 아무도 아닐 수도 있다.


그녀는 단순한 모델인가? 아니면 페르메이르의 상상 속 여인인가?


그녀의 표정은 확신과 불확실성 사이에 있다. 그녀의 입술은 말을 하려는 듯, 그러나 망설인다.


이것이 페르메이르가 그린 세계다. 그는 우리에게 완벽한 이야기를 주지 않는다.

대신,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남긴다.




A Maid Asleep, Johannes Vermeer, ca. 1656–57

“잠든 하녀”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56–57)

A Maid Asleep, Johannes Vermeer, ca. 1656–57 .jpeg A Maid Asleep, Johannes Vermeer, ca. 1656–57, 34 1/2 x 30 1/8 in. (87.6 x 76.5 cm)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감독받지 않는 하녀들의 부적절한 행동은 흔한 주제였다. 그러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한 잔의 와인 곁에서 졸고 있는 젊은 하녀를 그리면서,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넘어 빛과 색, 그리고 질감에 대한 탐구로 이 장면을 승화시켰다.


왼쪽에 놓인 넘어진 와인잔(현재는 세월이 지나 마모됨)과 구겨진 테이블 천방금 전에 누군가가 이곳을 떠났음을 암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엑스선 촬영(X-ray radiographs) 결과, 페르메이르는 원래 문간에 한 남성을 서 있게 그려 넣었으나, 이후 이를 삭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그림의 해석 가능성이 더욱 열리게 되었으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장면을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Venus and Adonis, Titian Vecellio, ca. 1554

비너스와 아도니스, 티치아노 베첼리오

Venus and Adonis,  Titian Vecellio, ca. 1554.jpeg Venus and Adonis, Titian Vecellio, 42 x 52 1/2 in. (106.7 x 133.4 cm)

이별의 순간 – 사랑과 운명의 갈림길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밤의 잔향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도니스는 이미 떠날 준비를 마쳤다.


비너스는 그를 붙잡는다. 그녀의 두 팔은 필사적으로 그의 몸을 감싼다. 그녀의 눈빛은 간절하다. 그녀의 손끝은 그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아도니스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이미 앞을 향해 있다. 그의 손은 창을 쥐고, 그의 개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사냥을 떠나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그의 운명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


티치아노의 색채 – 감정을 조각하는 붓질


이 장면은 단순한 순간이 아니다. 이것은 운명과 사랑이 충돌하는 찰나이다.


티치아노의 색채는 격렬하다. 비너스의 살결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핑크빛으로 빛난다.

그녀의 몸은 빛을 머금고 있으며, 그녀의 드러난 피부는 신성함과 인간적인 열정을 동시에 담고 있다.


반면, 아도니스의 몸은 차갑고 어둡다. 그의 붉은 망토는 뜨거운 피를 암시하며, 그의 이별을 막을 수 없음을 상징한다.


이 두 개의 색조는 대립한다. 뜨겁고 차가운 것, 머무르려는 것과 떠나려는 것. 이 모든 대비가

이별의 필연성을 더욱 강조한다.


사랑의 경고, 그리고 운명의 덫


비너스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녀는 아도니스가 이 사냥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안다.

그녀는 신이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다. 그녀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존재다.


그녀는 그를 막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할 수 없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도니스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젊고, 강하며, 두려움을 모른다. 그는 사랑을 뒤로하고, 자신이 원한 길을 간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그 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티치아노의 드라마 – 동작과 시선의 힘


이 장면은 정적인 장면이 아니다.

이것은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정지된 순간이다.

비너스는 아도니스를 끌어안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힘은 그를 막을 수 없다.

아도니스는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의 다리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아직 그녀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다. 개들은 앞을 향해 있다. 마치 그의 운명을 재촉하듯.

비너스의 몸은 하늘을 향한다. 그녀의 사랑은 땅을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아도니스의 몸은 땅에 뿌리를 내린다. 그는 결국 인간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작은 몸짓과 시선 속에서

티치아노는 이별의 비극을 완벽하게 담아낸다.


이 장면을 보는 우리는 안다.

아도니스는 곧 사냥에서 상처 입고 쓰러질 것이다. 비너스는 그를 다시 볼 수 없다.

그녀는 신이지만, 그를 되살릴 수 없다. 그녀는 영원히 그를 애도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다.

그는 여전히 떠나는 중이다. 모든 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 결정되었다.


우리는,

이 운명의 순간 앞에서

무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남자의 초상, 티치아노 베첼리오

Portrait of a Man Titian (Tiziano Vecellio) Italian  ca. 1515.jpeg Portrait of a Man, Titian (Tiziano Vecellio) Italian, ca. 1515, 50.2 x 45.1 cm

어둠 속에서 마주한 시선


그는 우리를 바라본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것보다

그가 우리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 같다.


검은 배경에서 떠오르는 얼굴. 그의 눈빛은 강렬하고도 침착하다. 그는 침묵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그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티치아노의 초상화는 단순한 얼굴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뛰어넘어, 한 인간의 영혼을 캔버스에 담아낸 것이다.


생동하는 피부와 감정


티치아노는 초상화를 그릴 때 정밀한 선보다는 느슨한 붓터치와 색채의 깊이로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는 빛과 그림자로 인물을 형성하고, 그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한다.


이 초상에서도,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따뜻한 질감을 가진다.

그의 피부, 그의 수염, 그의 깊고 어두운 눈 속에는 이름 없는 감정과 생각들이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티치아노의 힘이다. 그는 단순한 외형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린다.


그는 누구인가?


티치아노가 남긴 많은 초상화들은 그 모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는 손을 올려 옷깃을 가볍게 쥐고 있다.

그 작은 동작이 그의 존재에 자신감과 힘을 더한다.

그는 단순한 남성이 아니다. 그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물, 한 개성, 한 정신의 형상화다.


그는 이름 없는 초상 속에 있지만, 그의 얼굴은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침묵을 듣는다.


그의 표정은 단순한 미소도, 단순한 권위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 떠 있는 존재감 그 자체다.


그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거기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를 바라본다는 것.


그의 시선이 우리를 놓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게 된다.



The Crucifixion, Bernardo Daddi Italian, ca. 1325–30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베르나르도 다디

The Crucifixion, Bernardo Daddi.jpeg The Crucifixion, Bernardo Daddi Italian, ca. 1325–30, 44.5 x 28.9 cm

고통 속의 평온, 신성 속의 인간성


그는 십자가 위에 있다.

그의 머리는 숙여졌고,

그의 몸은 상처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절망이 아니다.

그는 고통을 초월한 듯한 침착함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처형의 장면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과 희생의 순간이다.


베르나르도 다디(Bernardo Daddi)는 14세기 피렌체에서 활동한 화가로, 그의 작품은 고딕 양식의 경건한 아름다움과 감정적 깊이를 동시에 담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그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면서도, 신성을 잃지 않는 표현을 보여준다.


색채와 빛 – 경건한 분위기의 조성


예수의 몸은 창백하지만 부드럽게 빛난다. 그의 육체는 고통받고 있지만, 여전히 신성한 빛을 머금고 있다.

배경은 어둡고 차분하다. 십자가는 하늘을 가르고 서 있지만, 주변의 색감은 강렬한 대비를 이루지 않는다.

이는 절망이 아닌, 숙명적인 희생의 느낌을 준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눈물은 조용하고, 그들의 손짓은 절제되어 있다.

슬픔은 격렬하지 않지만, 깊다.


베르나르도 다디의 화풍 – 신비롭고도 인간적인 종교화


베르나르도 다디는 조토(Giotto)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 그의 작품은 고딕 양식의 장식적 요소와 초기 르네상스적 인간적인 감정 표현이 공존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예수의 몸을 너무 극적으로 왜곡하지 않는다. 그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육체의 고통을 강조하기보다, 그가 상징하는 신성과 희생의 의미를 더욱 부각한다.


그의 십자가상 그림은 단순한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기도하는 이들에게 경건함과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한다.


십자가는 여전히 서 있다. 예수는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지만, 그의 표정은 고요한 용서와 희생의 결의를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묻는다.

“그의 고통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희생이란 무엇이며, 신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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