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 남겨지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붙잡는 것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기묘하게도 조용한 소설이다. 그 안에 담긴 비극은 눈물과 절규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담담한 문체 속에서 서서히 스며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자신이 이 작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가즈오 이시구로는 조용히, 꾸준히, 섬세하게 써내려간다.
그래서 더 강렬하다.
‘나를 보내지 마.’
그 한마디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 포기해야 하는 운명.
기억을 붙잡으려는 손길.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
기억은 이상한 것이다. 있다가 없고, 없던 것이 갑자기 떠오르고, 한순간 선명해졌다가 다시 희미해진다. 나를 보내지 마는 그런 기억 같은 소설이다. 어쩌면 한동안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떠올리려 애쓸수록 점점 더 멀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이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캐시는 기억한다.
그녀는 그들의 얼굴을, 목소리를, 들판의 바람을, 한때 거기 있었던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그녀는 운전한다.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들판을 지나고,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하늘은 회색빛이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디론가 도착할 것 같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같은 곳을 돌고 도는 건지도 모른다. 과거는 직선이 아니라 원일 수도 있다.
헤일셤.
처음에는 기숙학교 이야기 같다. 아름다운 자연, 아이들, 수업, 미술 작품.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너무 깨끗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완벽하다.
언제나 ‘너희는 특별해’라는 말이 따라온다.
특별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특별하다는 말 뒤에 감춰진 건 뭘까?
그리고 우리는 서서히 알게 된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는 취급을 받는다.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그들은 태어났고, 살아가고, 그리고 기증자가 된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마지막.
그때가 오면 그들은 ‘완료’된다.
사라진다. 끝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완료’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겁고 슬픈 단어였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말 끝난 걸까?
기억을 붙잡는 것.
그게 캐시가 하는 일이다.
그게 이 책이 하는 일이다.
토미는 들판에서 울부짖는다. 그 소리는 사라진다.
루스는 마지막 순간에 무언가를 후회한다. 그 후회도 사라진다.
하지만 캐시는 기억한다.
그래서 나도 기억한다.
기억하는 한, 그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존재는 계속되는 것인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을 보내지 않는 방법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소설을 읽었다면,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을 보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