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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연극 <Liebestod>를 중심으로 한 “시적 희생”과 마조히즘

by 김시연

안헬리카 리델의 작품 <Liebestod.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 후안 벨몬테>

IMG_3774.jpg 2025. 5. 4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 “사랑의 죽음”


죽음의 의식, 사랑의 소멸 — 안헬리카 리델 <Liebestod>에 대하여

제목이라는 피와 신화의 장치

프랑스 아방가르드 연극의 강렬한 목소리, 안헬리카 리델(Angélica Liddell)은 2021년 작품 <Liebestod.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 후안 벨몬테>를 통해 자신이 구축해 온 ‘시적 희생’의 미학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 이 작품의 제목은 단지 작품을 지시하는 이름이 아니라, 곧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적 프로그램이자 죽음의 의식서이며, 리델식 연극 언어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사랑의 죽음 — “Liebestod”

독일어 Liebestod는 Liebe(사랑) + Tod (죽음)으로 구성된 단어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Tristan und Isolde>에서 이졸데가 죽은 트리스탄을 따라 죽으며 부르는 마지막 아리아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아리아는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사랑, 육체를 초월한 열망, 자기희생을 통한 초월을 상징한다.

리델에게 이 단어는 단순한 낭만적 죽음이 아니라, 예술가가 무대 위에서 감정과 육체를 다 바쳐 스스로를 죽이며 이루는 절정의 상태로 시적 희생의 절정을 뜻한다. 이졸데는 죽은 연인을 따라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며, 사랑이 죽음을 통해만 완성될 수 있음을 노래한다. 리델은 이 “사랑의 죽음”을 자신의 연극으로 가져오며, 예술은 사랑과 동일한 방식으로,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숭고한 상태임을 선언한다. 무대 위에서 사랑은 살아남지 않는다. 오직 죽음만이 예술을 가능케 한다.


감각의 저주 —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이어지는 부제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터뷰 제목에서 가져온 문장으로, 리델은 이를 통해 폭력과 고통의 시각적 기억이 감각적 저주로 남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녀의 연극은 단지 불편한 감정을 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의 감각을 되돌릴 수 없이 오염시키는 체험, 예술이라는 이름의 트라우마다. 눈앞의 피는 단지 무대 소품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반복해서 씹고 삼키며 자신에게 먹이는 희생의 상징이자, 예술이라는 행위 자체가 동반하는 상처다.

이 문장을 통해 폭력과 고통의 시각적 충격이 결코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했지. 리델은 이 문장을 작품의 부제로 끌어와, 고통을 본 예술가의 눈이 그것을 지우지 못하는 저주받은 감각임을 강조하며, 예술가는 폭력과 죽음, 고통을 본 이후로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예감을 공유하게 된다.



후안 벨몬테 — 투우사의 그림자와 예술가의 몸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이름, “후안 벨몬테”는 20세기 스페인의 전설적 투우사로, 생전에도 고통을 미학으로 전환하는 인물이었고, 말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리델은 그를 통해 예술가의 자기 파괴성, 죽음을 향한 집착, 고통을 미학으로 전환하는 몸을 호출한다. 벨몬테는 리델 자신이며, 관객 앞에서 피 흘리는 투우사다. 리델은 극 중 반복적으로 “나는 황소이자 투우사”라 말하며,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있는 주체이자 객체, 수행자이자 희생물로 설정한다. 리델은 벨몬테에게 예술가의 운명, 즉 자기희생적 존재의 표상을 투영하며, 작품에서 그녀는 벨몬테의 정체성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예술이란 죽음을 반복하는 의식임을 선언한다.


무대는 투우장이며, 관객은 망설이는 사형집행자다

이 세 요소가 결합된 제목은 단순한 말장식이 아니라, 하나의 비극적 프로그램을 선언한다. 무대는 투우장이며, 리델은 황소이자 투우사, 제물이며 동시에 의식의 사제다. 관객은 그 희생의 과정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망설이는 사형집행자, 혹은 예술의 실패를 목격하는 자로 위치 지어진다.


이 작품에서 리델은 죽음을 연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죽음을 사유하며, 죽음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죽음의 형식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되묻는다.


예술은 정말로 살아 있기 위해 죽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미 살아 있다는 환각을 위해 반복해서 자기를 파괴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그녀의 작품 안에서 대답되지 않는다.

다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그 문장만이 관객의 감각 속에 묻혀, 긴 침묵처럼 남는다.


데뷔 시절: 세상에 ‘반(反)’하는 리델

2010년, 스페인 연출가 안헬리카 리델은 <La Casa de la Fuerza>(2009)로 프랑스 무대에 등장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멕시코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살해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리델의 연극이 정치적 언어를 가진 예술로서 사회적 불의에 대한 고발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대표적 희곡 중 하나인 <Belgrade>(2010) 역시, 보스니아 전쟁 당시의 학살을 다루며, 공포 앞에 선 인간의 조건을 묻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You Are My Destiny>(2015), <Que ferai-je, moi, de cette épée?>(2016), <The Scarlet Letter>(2019)와 같은 작품에서 리델은 정치적(운동적인) 의미에서의 연극과는 점점 더 멀어졌다.

대신 그녀는 ‘악의 도덕적 형태’에 접근하고, 인간 영혼의 심연을 탐색하겠다는 예술관을 표방한다.

예컨대 <Que ferai-je, moi, de cette épée?>에서는 연쇄살인범과 테러리스트와 같은 괴물적 인물에 연민을 품고, 일본 식인범 이세이 사가와의 살해 충동을 자신의 창작 충동에 빗대기도 한다.

이러한 작품들에 대한 평론의 반응은 더욱 적대적으로 변하며, 그녀는 점차 개인적이고 도발적인 창작자로서, 세상과 맞서는 전위의 전사로 신화화된다.

그녀는 스스로를 메시아적이고 고독한 인물로 무대에 세우며, 그 시적이고 파격적인 언어는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중, 즉 도덕적 권위를 대표하는 사회 전체와 마주한 리델은, 연극 무대 위에서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탐험할 수 있는 예술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신을 억압하려는 ‘선한 척하는 자들의 법정’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녀는 2024년 <Dämon>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며, 프랑스 매거진 ‘텔레라마’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불쾌함을 견디는 것이다. 창작은 우리가 마주하고 싶은 것만이 아니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응시하게 만든다. 내가 하는 일은 그저 진실을 보여주는 거다. 그리고 그 진실은 아주 자주, 피를 흘리고 있다.”

“나는 폭력을 혐오하고, 결코 도발을 추구하지 않아. 다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악과 어둠을 작업한다는 것은 사회가 너무도 검열해 버린 우리 본연의 일부를 되찾는 일이기도 해. 그런데 사회와 민주주의에 ‘좋은 것’은, 연극에는 전혀 ‘좋지 않을’ 수 있어. 연극은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예술이어야 하거든. 나는 1980~90년대 세대야. 그 시절 우리는 이 모든 걸 이해했고, 파솔리니와 사드, 바타이유, 주네를 사랑했지. 오늘날의 ‘품위’라는 이름의 위선은 도리어 우리를 충격에 빠뜨려. 요즘은 젊은이들보다 오히려 노인들과 더 잘 통하는 기분이야. 다시 베르그만으로 돌아가 보자면,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예술은 자유롭고, 부끄러움 없으며,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어.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선한 척하는 자들의 재판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야.”

— 안헬리카 리델, 2024년 7월 2일


IMG_3776.JPG 2025. 5. 4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Liebestod

Liebestod의 전환점

안헬리카 리델의 Liebestod는 단순히 기존 스타일을 반복한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는 그녀 자신의 미학, 특히 파격과 고통을 통한 예술이라는 전략이 지쳐가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러한 피로감과 창작의 모순을 리델 스스로가 작품 속에서 드러내고 고백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여전히 인간의 심연, 육체, 종교적 상징, 죽음, 피, 고통을 다룬다. 하지만 이 모든 표현이 더 이상 관객을 충격에 빠뜨리거나 저항하게 하지 않는다는 자각이 있다. 즉, 그녀의 상징적 언어가 오늘날 연극 환경 속에서 자기 복제나 무력감의 형태로 변질될 수 있음을 인식한 순간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Liebestod는 그녀가 더 이상 외부를 향해 전복을 외치는 작가가 아니라, 자기 내부를 향해 질문하고 파고드는 창작자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극 중에서 Juan Belmonte라는 투우사의 삶과 신화를 소환하면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예술의 본질, 예술가의 고독, 실패한 구원 등을 다룬다. 그러나 이전의 ‘충격적 파격’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짐과 침묵, 체념과 질문의 형식으로 말이다.

<Liebestod>는 리델이 자기 예술의 경계와 한계를 직면하고, 그것을 무대 위에서 ‘고백’하고 ‘반성’하며 ‘변모’하기 시작한 기점이다.


<Liebestod>, 안헬리카 리델의 전환점 ― 시적 희생의 한계와 자기 해체의 미학

<Liebestod>는 단순한 연극이 아니라, 안헬리카 리델 자신의 창작 철학에 대한 깊은 자기반성과 고백이다. 리델은 이 작품을 통해 ‘예술은 필연적으로 파격이어야 하며, 때론 희생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을 스스로 의심하고, 그것이 현재 연극 안에서 어떻게 무력화되고 있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이 고백은 극 중 드러나는 극도의 나약함과 상처받은 자아를 통해 전개된다.


투우는 비유다 ― 예술가이자 제물인 리델

<Liebestod>는 투우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지만, 투우사와 황소라는 상징적 구조 속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리델은 “나는 황소이자 투우사”라고 말하며, 관객 앞에 예술을 드러내는 그 ‘투우장’에서 자기 자신을 찢고, 내던지며, 죽음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투우사 후안 벨몬테(Juan Belmonte)의 자살을 언급하며, 예술가가 선택한 자발적 파괴의 상징으로 삼는다.


자기혐오의 독백 ― 예술의 실패를 고백하다

극 중 두 번째 파트는 리델의 30분에 달하는 독백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그녀는 관객을 향해, 또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넌 여자를 위한 글이나 쓰는 작가야. 너의 독자는 한심한 페미니스트, 대학원생, 인스타 덕후들일뿐이야.”

“사람들은 너와 네 슬픔, 너의 피, 눈물, 오줌, 시체 냄새에 질렸어.”

“넌 구원도, 진실도, 아무것도 전하지 못해.”

이 장면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자기 예술의 붕괴 선언이다. 그동안 그녀를 지탱했던 ‘자기 고백적 연극’, ‘시적 폭력’, ’ 예술가의 고통’이 이제는 효과를 잃고, 오히려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무대에서 그대로 드러낸다.


성스러운 예식, 그리고 피로감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도 의식처럼 구성된다. 무대에는 성찬식을 연상시키는 빵과 와인, 피와 자해, 음악과 반복적 동작이 등장한다.

리델은 자신의 피를 빵으로 닦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스스로를 먹어 치우는 자가희생의 의식을 반복한다.

하지만 반복이 거듭될수록 열정은 지치고, 그녀의 표정은 무감각해지며, 이 퍼포먼스에서 예술의 소진과 허무를 마주하게 된다.


사랑 없는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리델은 어느 순간 음성 톤을 낮추며 이렇게 고백한다:

“성공과 명성을 얻은 순간, 동시에 극도의 혐오와 절망에 휩싸였지.

내가 하던 건 의미 없는 짓처럼 느껴졌고, 책임감만 남았을 뿐… 그 안에는 더 이상 사랑도, 열정도, 황홀도 없었어.”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지 인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예술을 떠받치는 근본적 열정을 뜻한다. 리델은 자신의 연극이 이제 그 사랑을 잃었음을 자각하고, 그 자체를 무대 위에서 장례식처럼 해체한다.


희생은 끝났는가?

리델은 끝내 묻는다. 예술이 더 이상 충격을 줄 수 없다면,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피 흘리는 몸으로 침묵한다.


리델의 고통스러운 ‘시적 희생’

안헬리카 리델이 말하는 ‘시적 희생(sacrifice poétique)’은 그녀의 연극 행위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핵심 개념이다. 그녀는 이를 개인이 사회 일반과 충돌하는 급진적 행위로 상정한다.

리델에게 있어, 예술가는 자신의 몸을 통해 관객에게 사회 질서 속에서 억눌린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이 희생은 폭력적이고 외로운 믿음의 행위이며, 종종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언어로 이루어진다.


“희생은 믿음의 고독한 행위다. 무대는 고독을 위한 공간이다. 관객은 이 고독한 시험을 목격하며, 신앙의 부조리한 행위 앞에 선다.” (Liddell, 2015)

하지만 이 희생은 모순적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헌신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비논리적 믿음의 행위다. 리델은 키르케고르가 말한 ‘보편적 고독’ 속에서 연기하며, 이 희생을 통해 관객에게 존재의 연속성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녀는 이러한 희생이 무대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으며, “자살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말한다.


마조히즘의 의식 — 고통받고, 가르치고, 파괴하다

<Liebestod>는 마조히즘적 미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들뢰즈의 이론에 따르면, 마조히스트는 고통의 피해자가 아니라, 그것을 연출하고 교정하며, 고통의식을 통해 미적 고양에 이르는 존재이다.

리델은 바로 이런 마조히스트다. 그녀는 관객에게 고통을 요청하고, 그 고통을 위한 의식을 지휘하며, 그를 통해 존재의 진실에 접근하려 한다.


“나는 황소이자 투우사다. 관객은 나를 죽이기 위한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이자, 동시에 나의 희생을 통해 정화되는 자다.”

하지만 <Liebestod>에서 리델은 관객을 향한 불신과 혐오를 드러낸다. 그녀는 말한다:

“너희들은 나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냥 피곤한 거다. 내 슬픔, 피, 구역질 나는 감정에 질린 거다.”

이처럼 관객은 리델의 연극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비판되고, 혐오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의식에 참여해야 하는 모순된 존재다.


무대 위의 고립 — 희생은 계속되지만, 의미는 흐려진다

문제는, 리델의 연극이 점점 관객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녀가 말하는 ‘시적 희생’은 더 이상 충격을 주지 못하고, 반복되는 자기 파괴로 귀결된다.

관객은 환영받지 못하면서도 반드시 있어야 하며, 혐오의 대상이자 정화의 수혜자가 되는 불분명한 위치에 놓인다. 결국, 리델의 연극은 관객과 함께 투우장 안에 갇힌, 파괴와 정화의 이중적 의식으로 구성된다.


끊임없는 자기희생의 미적 모순

<Liebestod>는 리델의 모든 모순과 고백을 집약한 작품이다. 그녀는 자기 연극을 스스로 파괴하면서도, 그 속에서 예술적 진실을 찾고자 한다. 그녀에게 있어 예술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자기희생의 반복이며, 이는 관객에게 고통과 아름다움의 경계를 묻는 장치로 기능한다.


“예술은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희생이 관객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가? 아니면 단지 반복되는 의식에 불과한가?

IMG_3771.jpg 2025. 5. 4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 Liebest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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