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송이의 카네이션
2025.11.15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
‘몸의 철학’, ‘질서와 존재의 조건’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을 보러 세종시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서울보다 좋은 좌석이고, 예술인패스까지 적용되어서 2시간 거리를 차로 달려가서 관람했다.
세종문화회관의 큰 무대 아래, 나는 한참 동안 꽃 냄새도 없는 꽃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천 송이의 카네이션이 펼쳐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꽃들은 아무 향도 없었다.
대신 몸의 냄새, 숨의 온도, 움직임의 떨림이 공기를 대신 채웠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밀려왔다.
공연이 시작되고 오래지 않아, 한 무용수가 조용히 몸을 구부렸다 일어나는 모습을 봤다.
그 단순한 동작이 자꾸 반복되면서, 나는 그가 반복에 갇혀 흔들리는 작은 나침반처럼 보였다.
어떤 방향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무언가에 의해 움직여야만 하는 몸.
그의 움직임이 내 가슴 안쪽에 이상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그 반복이 점점 무대 전체로 번지고, 사람들이 꽃밭 위에서 흔들리듯 몸을 구부렸다 일어서기 시작할 때
나는 갑자기 아주 오래된 슬픔의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그건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일 자체'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그러다 장면이 바뀌고, 무용수들은 검문을 당했고, 여권을 확인받았고, 어떤 남자는 원피스를 벗고 양복을 입었다. 그 순간, 꽃밭 위에 놓인 ‘양복’이라는 단단한 외피가 이 세계 전체를 갑자기 딱딱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꽃과 양복 사이에 선 인간이 얼마나 이상한 모습인지, 그 낯섦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주 길들여지는지 떠올렸다.
그러던 중, 무대 위에서 무용수들이 모두 일어나 어떤 복잡한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군무처럼 보였다. 마치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갑자기 같은 리듬, 같은 패턴에 몸을 싣는 것처럼.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우리 삶의 어떤 순간들, 눈치 보며 따라가는 몸짓들, 남의 삶에 맞추느라 굳어진 근육들을 같이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작들이 점점 길고 길게 이어지다가 갑자기 장면의 중심이 바뀌는 순간, 아, 나는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그들은 서로를 포옹하기 위해 한없이 빙 돌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숨을 한 번 삼켰다. 내 몸이 스스로 움찔하는 걸 느꼈다. 포옹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늦게 찾아올 수도 있는 거구나, 그렇게 미루고 미뤄져 오다가 갑자기 마음을 겨누는 거구나.
꽃밭 위에서 이루어진 그 포옹은 달콤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쓸쓸했고, 조심스럽고, 언제든 다시 부서질 수 있는 몸의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껴안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그 사람을 껴안기까지 견뎌온 시간인 것처럼 보였다.
공연은 그 뒤로 계속해서 꽃이 짓밟히고, 몸이 무너지고, 움직임이 진흙처럼 느려지는 장면들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포옹 이후로 모든 장면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졌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통제되고, 따라 움직이고, 지쳐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 후에는 그 사람들이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마지막 남은 온도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꽃밭 위의 모든 몸은 그때부터 더 이상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꽃밭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 위에서 인간은 여전히 흔들리고, 지치고, 순응하고, 때때로 저항한다.
오늘,
세종문화회관의 꽃밭을 나오는 길에 나는 문득 가벼워진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무거워진 것도 아니었다.
대신
내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떤 부드러운 감정을 조금 되찾은 것 같았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서로를 포옹했고, 나는 객석에서 나 자신을 아주 조심스럽게 안아본 것 같다.
ANIMA - Thom Yorke - Paul Thomas Anderson Short Film이 떠올랐다.
피곤하고, 끌려가고, 복종적이고 그 안에서 미세하게 저항적으로 보이는데 피나 바우쉬의 세계와 닮아 있다.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과 폴 토머스 앤더슨의 ANIMA는 서로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다른 형식이다.
하나는 꽃밭 위에서, 하나는 도시의 지하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공통된 맥락이 흐른다. 그것은 반복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깎여나가는가, 그리고 그 깎인 틈에서 어떤 움직임이 생겨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카네이션의 무용수들은 꽃밭 위에서 허리를 굽히고 일어서며, 검문을 받고, 반복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린다. 그들의 동작은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어떤 보이지 않는 규율을 드러낸다. 반복할수록 몸은 감정을 잃고, 감정을 잃을수록 몸은 기계화된다. 그러나 그 기계적 순간들 속에서도, 몸은 작은 흔들림을 통해 저항한다.
ANIMA에서 톰 요크는 도시의 기계적 질서 속에서 밀려다니고 흔들리고, 같은 리듬에 끌려가며, 어느 순간 탈출하려는 몸의 충동을 보여준다. 반복 속에서 억눌리는 인간, 그리고 억눌린 인간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변형. 그것은 피나 바우쉬의 신체 언어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결국 두 작품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흔들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인간은 때때로 춤을 만들어낸다. 아주 짧게,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감독과 안무가의 관점에서 두 작품을 비교하면, 카네이션과 ANIMA는 “반복”을 전혀 다르게 사용하면서도 결국 동일한 미학적 지점으로 귀결된다.
공간, 꽃밭 vs 도시
피나 바우쉬는 부드러운 공간(꽃밭)에 인간의 취약성을 얹는다. 아름다움에 균열이 생기며 의미가 발생한다.
ANIMA는 딱딱한 공간(지하철, 콘크리트)에 인간의 무력함을 놓는다. 경직된 외부 구조가 신체의 리듬을 억압한다. 서로 다른 공간을 사용하지만 둘 다 공간을 몸의 심리 상태를 외화 하는 장치로 사용한다.
반복의 목적: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
피나의 반복은 감정의 침식을 보여준다. 반복할수록 감정은 희미해지고, 신체는 더 순응적이 된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반복은 사회적 압력의 계산된 리듬을 보여준다. 도시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기능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두 반복은 결국 동일한 질문에 닿는다:
“우리는 움직임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움직임이 우리를 선택하는가?”
집단 안무, 동일한 리듬에 삼켜지는 몸
두 작품은 ‘집단이 개인을 흡수하는 방식’을 거의 동일한 카메라적/안무적 문법으로 보여준다.
피나는 집단이 반복적인 제스처로 하나의 패턴을 형성, 개인의 감정이 흐려지고
폴 토머스 앤더슨은 군중이 동시에 기울고, 동시에 걸어가고, 동시에 쓸려가며 톰 요크를 삼킴.
감독·안무가적 관점에서 보면 두 연출자는 개인의 의지를 압도하는 거대한 ‘움직임의 집단성’을 드러내기 위해 전혀 다른 배경을 사용하면서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탈출의 장면: 반복을 감염시키는 ‘균열’
두 작품 모두 반복을 깨는 순간에 강렬한 변화가 등장한다.
카네이션에서 반복 속에서 무너지는 몸, 갑작스러운 포옹, 양복으로의 전환 등이 반복의 서사적 균열을 만들어낸다. ANIMA에서 톰 요크가 반복에서 벗어나 연인의 움직임과 공명하는 순간 기계적 리듬에서 인간적 리듬으로 변환이 일어난다.
두 작품의 핵심은 ‘반복 → 균열 → 인간성’이라는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서로를 비추는 두 세계
카네이션은 인간의 취약함을 꽃밭 위에 올려놓았다. ANIMA는 인간의 무력함을 도시 시스템 속에 가두어두었다.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지만, 그 속을 흐르는 신체의 철학, 반복의 문법, 집단 속 개인의 흔들림은 닮아 있다.
둘은 마치 서로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한 편의 이중 노트처럼 읽힌다. 하나는 부드러운 재질로, 하나는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졌을 뿐 두 작품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은 결국 같다.
인간은 반복 속에서 지워지는 존재이며, 그 지워진 틈에서 아주 잠깐, 스스로를 증명하는 존재이다.
꽃밭에서든 지하철에서든,
우리는 흔들리고 밀리고, 때때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극히 짧은 순간,
포옹처럼, 균열처럼, 어딘가에서 인간다움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