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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Oct 17. 2019

작품이 작품을 기억하는 방식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과 소설 <사평역>

작품이 작품을 기억하는 방식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과 소설 <사평역> 

https://artlecture.com/article/667


어떤 작품의 존재 방식은 직선이 아니라 원이다. 시간은 강물처럼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내려가는데, 어떤 작품은 시간의 물결에 제 몸을 맡기지 않는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고, 흡사 영겁회귀와 같은 반복을 통해 작품은 몸집을 부풀린다. 시간의 물결이 작품과 함께 밀려내려갈 때, 그때마다 작품을 건져올리는 것은 단연 비평가와 예술가의 몫이다. 비평가와 예술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Text)의 의미를 생성한다. (그 자체로 의미가 풍성한 작품도 있지만) 작품은 생성된 의미를 소화함으로써 제 몸의 살집을 키운다. 그렇게 본다면,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은 벌써 몸집이 큰 ‘거인’일 것이다. 


이 거인의 몸엔 이미 수많은 ‘의미’라는 살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여기에 무엇을 더한다한들, 특별할까. 하지만 훌륭한 작품은 또다른 의미의 살이 붙을 수 있도록 여백을 남긴다. 촘촘한 의미의 그물망으로 작품 속 의미를 길어올려도, 여전히 걸러지지 않은 해석의 여지와 감정의 공백이 훌륭한 작품에는 존재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절묘한 ‘거리두기’라고 생각한다. 관객이 그림(속 인물, 상황, 배경)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도록 적당히 밀어내면서, 동시에 형언할 수 없지만 형형한 감정으로 끌어당기는 절묘한 거리. 그림과 관람객, 영화와 관객 사이의 떨어진 거리에서 에드워드 호퍼 작품의 무한한 해석과 의미가 새로운 옷을 입고 탄생한다. 


아닌게 아니라, 문학 미술평론가 롤프 G. 레너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얼핏 리얼리즘에 충실한 듯한 호퍼의 회화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복제하는 대신 빈공간을 창조한다.호퍼작품의 심연은 서술 텍스트가 갑자기 끊길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이럴때 비평가와 관람객들은 그 공백을 메우고자 노력한다. ”모르긴해도,영화<셜리에 관한 모든 것> 역시 구스타브 도이치 감독이 그 공백을 메우고자 노력한 결과물일 것이다. 영화 속 13개의 시퀀스는 전부 호퍼의 그림 13점의 장면에서 가져왔다. 구스타브 도이치 감독은 평면적인 그림에 입체적인 이야기를 붙인다. 


콕 짚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은 이야기하는 방식이 에드워드 호퍼를 닮아있다. 단순히 영화적인 미장센이 호퍼의 그림과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다. 모양은 흉내낼 수 있어도, 감정은 그럴 수 없다. 영화에서 그림과 같은 아득한 쓸쓸함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를 닮은 ‘거리감’에 있다. 영화는 결코 관객을 ‘셜리’와 일치하게 만들지 않는다. 영화는 셜리의 ‘외면’(사건)을 다루기 보다, 셜리의 ‘내면’(장면)에 카메라를 가져다댄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의 제목과 달리,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인물을 이해하거나 사랑하려면, 이야기 속에서 인물이 거대한 사건에 부딪혀 실패하거나 몰락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지, 우리는 셜리에 관한 모든 것(내면, 장면)을 ‘어렴풋이’ 알 따름이다.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에, 기차에 앉아있는 옆모습에, 무엇인가 견디기 시작한(또는 무엇인가 결별하려하는) 사람의 묵묵한 예감만이 배어있다. 


그 예감에서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보는 이에 따라서 영화가 그림보다 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을 텐데, 그건 감독의 이야기(해석)가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포착하는 총 13개의 장면에서 시간적 배경은 독특하다. 그 장면의 시간배경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거나, 사건이 일어난 후다. 극 중 셜리의 말처럼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는" 시간이다. 과거를 겪었지만, 미래를 겪지 않은 상태, 늘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 ‘머무름과 떠남’ 사이에서 서성이는 인물. 그래서 셜리가 있는 공간은 늘 어디론가 가는 중이거나(<체어 카>), 잠깐 머물다가 곧 떠날 곳이다. (<호텔 룸>, <호텔 로비>) 머물지만, 곧 떠날 그녀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녀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태’로 존재한다. 기차에서 시작했다가, 기차로 끝나는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은 되어가고(Being), 나아가는(Going)그녀의 존재방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다. 다만,어디론가를향해가고있을뿐이다.사건(외면)이 아니라, 존재(내면)에 초점을 두는 것. 이것이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이 에드워드 호퍼 작품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영화의 장면 중


영화가 그림을 기억했다면, 이번에는 소설이 시를 기억하는 방식을 이야기해 볼 차례다. 한국에서도 위의 예와 비슷하게 훌륭한 사례가 있다. 소설가 임철우는 곽재우의 시(«사평역에서»)에서 영감을 받아, 단편소설 «사평역»으로 이야기를 불어넣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 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사평역에서> 전문




임철우는 이 ‘그림’과 같은 곽재우의 시 <사평역에서>에, ‘영화’같은 단편소설 <사평역>을 만들어 주었다. 시와 소설에서 차이가 있다면, 소설에서 화자는 시와 달리 ‘나’가 아니라 3인칭 작가시점이다. 이 선택이 절묘한 이유는 ‘절묘한 거리감’에 있다. 독자와 소설 속 인물 사이에는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적당한 거리가 있다. 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쓸쓸함은 여기에서 기원한다. 


시는 인물의 인상을 보여주고(‘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는’) 소설은 인물의 내면을 보여준다. (“아들은 고통으로 짙게 고랑을 파고 있는 노인의 추한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약간 죄스러운 맘이 된다. ‘이거, 내가 무슨 짓이다냐. 죄받는다, 죄받어……’ 노인이 또 쿨룩쿨룩 기침을 토해낸다. 가슴 밑바닥을 쇠갈퀴로 긁어내는 듯한 고통스런 기침소리_단편소설<사평역>) 시는 ‘나’의 이야기를 상상했지만, 소설은 사평역 속 ‘인물’의 이야기를 상상한다. 아마, 소설가 임철우에게 시 <사평역에서>의 인물들은 ‘셜리’처럼 빈 공간이자, 무한한 가능태로 존재하는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임철우는 작품과 자신 사이의 벌어진 거리를 소설을 통해 메우고자 한 것이다. 


(훌륭한) 작품이 (탁월한) 작품을 기억하는 방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영화 속 셜리의 대사처럼 그림과 시는 “사연 모를 육체”로 존재한다. 영화와 소설은 사연 모를 육체에 ‘이야기’라는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점에서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과 임철우 소설가에게 나는 하나의 ‘윤리’를 배운다. ‘타인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는 것’. 필연적인 이기심과 탐욕으로 내내 자기 자신만을 향해있던 나의 고개를 들어 작품 속의 타인의 이야기를 마주 보라는 것. 물론, 완전히 타인의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알지 못하겠지만, 어렴풋하게, 간신히라도 타인의 삶에 귀를 기울여보라는 것. 아직 해석되지 않아 ‘사연 모를 육체’로 존재하는 작품의 이야기에, 그리고 타인의 삶을 관심가져보라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을 배운다. 그래서 나는 ‘작품’이 ‘작품’을 기억하는 ‘작품’을 무척 좋아한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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