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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Nov 06. 2019

갇힌 것은 아름답다:

공주는 왜 갇혀야 할까

갇힌 것은 아름답다: 공주는 왜 갇혀야 할까

https://artlecture.com/article/579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샬롯의 여인(The Lady of Shalott)>, 1888, Tate Britain(런던, 영국)



마치 황홀경에 빠진 어떤 예지자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재앙을 보는 것처럼

그녀는 희미하게 펼쳐진 넓은 수면 저편의 카멜롯을 바라보았다

날이 저물자 그녀는 사슬을 풀고 누웠다

넓은 강물은 그녀를 멀리 실어갔다.

샬롯의 여인을...


좌우로 느슨하게 나부끼는 눈처럼 흰 옷을 입고 누웠을 때

나뭇잎들이 그녀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고

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카멜롯으로 흘러갔다

뱃머리가 흔들리면서

버드나무와 언덕들 사이로 구불구불 돌고

그들은 그녀가 부르는 마지막 노래를 들었다

샬롯의 여인의..


<중략>


이게 누구야? 이게 뭐지?

가까이의 불빛 찬란한 궁전에서

왕실의 떠들썩한 소리가 사라지고

카멜롯의 모든 기사들은 공포에 떨며 성호를 그었다

하지만 랜슬롯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하기를

"아름다운 얼굴이구나.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내려주소서.

샬롯의 여인에게.."


알프레드 테니슨 '샬롯의 여인'(1832)




<원탁의 기사>,<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등으로 익숙한 영국의 아더왕 설화는 그리스/로마 신화, 성서만큼이나 서양 문화의 주요한 모티브를 이룬다. 이 그림 역시 아더왕과 템플 기사단의 설화에서 출발했다. 옛날 옛날에, 로 시작되지만 동화 같은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이야기. 아더왕이왕위를 차지하고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릴 무렵, 인근의 샬롯 성에는 일레인이라는 아름다운공주(영주의 딸)가 있었다.흰 피부와 빛나는 외모 덕분에 ‘백합 아가씨’라고불리기도 했던 일레인은, 신분을 감추고 마상 대회에 참가했던 원탁의 기사 랜슬롯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대회에서 부상을 입은 랜슬롯 을 간호하던 일레인은 랜슬롯이 떠나기 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랜슬롯의 마음은 다른 여인을 향해 있었다. 하필이면 결혼한 여인, 하필이면 자신의 주군인 아더왕의 비인 귀네비어 왕비. 랜슬롯은단호하게 일레인을 거절하고 떠난다. 일레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자신을 랜슬롯 경이 있는 카멜롯으로 배에 띄워 보내 달라는 청을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뜬다. 카멜론에 도착한 일레인과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된 랜슬롯 경은 그녀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준다.


이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에서 좀 더 신화적으로 재탄생한다.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저주를 받은 공주 일레인은 탑 안에 갇혀 베를 짜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바깥 세상을 직접 보는 순간 그녀가 짜던 베의 실이 그녀를 휘감아 죽게 된다는 잔혹한 저주. 비운의 공주는 평생을 베틀 앞에 앉아 지루한 물레질을 반복한다. 오직거울을 통해 바깥 세상을 보는 것만이 허락된 그녀의 삶 속에서, 그녀는 거울에 비친 랜슬롯 경을 보게되고 만다. 그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 일레인은 저주조차 망각한 채 고개를 돌려 랜슬롯 경을 바라본다. 여인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랜슬롯 경을. 그리고 저주가닥쳐 일레인은 실에 휘감겨 죽음을 맞는다. 비운의 여인이 처한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 자신이 짜던 실에 의해 몸이 감겨야 하는 아이러니가 영감을 준 탓인지 라파엘 전파의 화가에게 여인의 가엾고 얄궂은 이야기는 종종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샬롯의여인(The Lady of Shalott)>, 1905, 아테네움(Ateneum, 헬싱키, 핀란드)



그림과 설화를 향한 애처로운 시선 속에 하나의 물음이 떠오른다. 왜여인은 갇혀야 할까. 갇혀 있는 여인의 신화와 설화는 문화권을 막론하고 존재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갇힌 여인'의원형은 아마 페르세포네일 것이다. 지하세계의 왕 하데스의 부인. 그녀를갇히게 만든 것 역시 그녀의 아름다움이었다. 결국 풀려나지만 스스로의 힘이 아닌 그녀의 어머니,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덕분이었다. 그녀가 먹은 석류알로 인해 겨울이생긴다. 당시에는 죽음의 계절로 보였을, 생명이 꽃피우고 열매맺지 못하는 계절. 그렇다. 갇혀 있다는 것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것이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페르세포네(Proserpine), 1874, Tate Britain(런던, 영국)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랜슬롯경을 바라보는 샬롯의 여인(The Lady of Shalott Looking at Lancelot), 



이 그림의 힘은 여인의 시선에 있다. 저주가 발현되는 전의 두그림에서 샬롯의 여인은 정면을 응시하지 않는다. 아예 눈을 감고 운명을 기다리고 있거나, 공포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체념과 비애로 가득 찬 우수어린 표정은 가련하고, 실이 여인의 몸을 휘감아 버리는 극적인 순간이 역동적으로 묘사된 장면은 손을 꽉 쥐게 만든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샬롯의 여인은 운명 앞에 맞서기로 한 여인의 모습을 보인다. 모든 것을 감당하고 죽음마저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결의에 찬 표정. '무엇이든맞서 주마(Come what may)' 라는 득한 표정이다. ‘랜슬롯경을 바라보는 샬롯의 여인’이라는 제목은, 바꿔 말하면 ‘죽음을 눈 앞에 둔 샬롯의 여인’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곧 죽음의 이름과도 같으므로. 그러나 똑바로 맞은편을 응시하는 그녀의 표정은 ‘나는 준비가 되었다’ 고말하는 듯하다.


'갇혀 있는 여인'의모티브는 현대에도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갇힌 것은 모두 아름답다. 탑에갇힌 라푼젤이 그러했고 얼음에 갇힌 엘사가 그러했고 야수의 성에 갇힌 벨이 그러했고 언어의 벽에 갇힌 인어공주가 그러했다. 사실 아름다운 것들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갇힌다. 덜 아름답고덜 빛나고 덜 선했더라면 갇히지 않았을 그들. 그들은 모두 금기의 탑에 갇힌다.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어떤 규율이 그들을 가로막는다. 보이지 않는절대자의 손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두려움이 그들의 손발을 묶는다. 그러나 갇힌 것은 풀리기 위해 존재하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자유로울 때 더욱 본연의 빛으로 아름답다. 모든 이야기 속의 금기는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이야기도 될 수 없으므로.


샬롯의 여인과 가장 유사한 원형을 가진 이야기는 라푼젤일 것이다. 탑에 갇혀 실타래 같은 머리를 땋으며 지내는 라푼젤. 21세기 디즈니 만화의 라푼젤은 탑에서 나와 운명과마주한다. 그녀는 수동적으로 규율에 순응하는 대신, 끊임없이의문을 품는다. 왜 나가면 안 되는 것일까? 저 밖에는 무엇이있을까? 정말 나가면 무시무시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삶에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 라푼젤은 금기를 의심하고, 논리의 허점을 발견한다. ‘절대’ 라는 것은 없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깨닫고 바깥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마주한다. 절대 나오면 안될 것 같은 어떤 것에서 벗어났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저주도괴물도 지옥도 죽음도 아니었다. 이전까지 본 적 없던 새롭고 찬란한 세상이, 그녀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배에 실려 떠내려간 샬롯의 여인 대신, 라푼젤은 배를 타고 새로운세상으로 나아간다.



샬롯의 여인은 금기를 알면서도 금기를 깬다. 적어도 그녀는 사랑하는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때로는 희망 없이 무한히 주어지는 삶보다 기쁨으로 가득한유한한 삶이 낫다는 것을. '가늘고 길게' 몸을 사리며 살지만, 사리가 나올 것 같을 때가 있다. 짧은 시간이라도 생에서 단 한번이라도 원하는 것을 이뤄본 삶과 머릿속에 그리기만 한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 중 어떤 편이 행복할까. 샬롯의여인은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부여받은 것이다. 비운의 여인이지만 뒤집어 보면 죽음의키를 자신이 쥐고 있었던 여인.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일생에 단 한 번, 단 하나뿐임을 알고 있었던 여인은 그 기회를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보는 데 써 버린다. 그로 인해 생이 끝나 버릴지라도, 두렵지도 아깝지도 않을 만큼 간절한한 사람을 위해.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시가 되고, 그림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한 여인이 갇힌 성 밖으로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야기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깨어 일어나겠다고 생각하는 각성의 순간이 있다. 갇힌것을 깨고 나와 새로이 탄생하는 순간. 그 순간이 언제일지, 어떤계기로 찾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모두 삶에서 한 번쯤 어떤 고비를 마주할 것이고, 그로 인해 스스로 매몰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실패를 용납하지않고 도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문화는 더더욱 스스로를 배척하게 만든다. 그러나 스스로의 운명에 내린저주를 풀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 운명의 주체인 ‘나’뿐이다. 갇힌 것을 깨야 하고 갇힌 의식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생은 언제나 2 라운드를 허용하므로. 나를 옴쭉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금기가 있는가. 손발을 묶고 정신을 옭아매어 아무런 도전도 시도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금기가 있는가. 그렇다면 금기를 깨 보자. 알게 될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트렉처 에디터_반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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