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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Dec 17. 2019

존재의 무게에 대한 탐구

<프라하의 봄> 원작과 무엇이 다르고, 어떤 매력을 지녔나

https://artlecture.com/article/1268



삶이 나한테는 무거운데 당신한테는 너무 가벼워. 이런 가벼움과 방종을 참을 수가 없어."

- 프라하의 봄 中에서



 ‘프라하의 봄’이란 영화는 마치 제목만 들으면 봄날에 두 남녀가 만나 달콤한 사랑을 하는 로맨스영화일 것만 같다. 프라하의 비눗방울 터지는 거리를 상상하며 이 영화를 선택한 이들도 꽤 될 것이다. 실제로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맞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은 원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밀란 쿤데라의 저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영화 제목이 원작과 달리 뜬금없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을 일컫는 말로, 소련군의 프라하 침공 전후가 이 시기에 포함된다.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제목인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실 필자는 책을 읽은 후에 영화를 본 사람이다. 원작을 본 이들이 누구나 그렇듯이, 필자 또한 반절의 기대와 반절의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원작을 쓴 작가 밀란 쿤데라가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상당히 불쾌해했으며, 다신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듣고 나니 더더욱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왜일까, 인간은 두려워하면서도 자꾸 도전하지 않는가. 후회도 내 몫이란 생각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원작 작가가 어떤 부분에서 불만족스러웠는지 이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영화 자체만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느껴졌다.


물론 영화를 먼저 접한 사람들은 영상미에 한 번 반하고 영화가 어렴풋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원작 소설을 찾아보게 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과연 원작과 어떠한 면이 비슷하고 또 달랐으며, 그렇기에 드러나는 영화만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이하 내용은 영화의 줄거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가벼움 또는 무거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88년 필립 카우프만 감독이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으로 영화화했고, 한국에선 ‘프라하의 봄’이란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두 작품은 모두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남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가벼움과 무거움을 상징한다.


토마시는 유능한 외과 의사로, 여자들과의 성관계를 통해 여자들의 고유한 특이성을 분석하고 소유하는 것을 즐긴다. 이는 사람의 뇌를 절개해 특징을 분석하는 외과의사로서의 행동과도 닮아있다. 어떠한 책임이나 굴레에 갇히지 않으려는 가벼운 개인의 삶을 지향하지만 테레자를 만나 변화한다.


테레자는 경박한 어머니 밑에서 술집 종업원을 했으며, 신분상승을 꿈꾸며 책을 읽었다. 운명적인 사랑이 영혼을 구원해줄 것을 믿으며, 토마시를 사랑하지만 그의 사랑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사비나는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로, 가벼움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정치적·사회적 속박을 싫어한다. 토마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이자 그의 섹스 파트너들 중 하나다. 배반과 이중성을 즐기며, 키치를 혐오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키치가 무엇인지는 아래의 소주제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프란츠는 프랑스인이자 대학교수로, 사비나의 애인이다. 진보적이지만 고지식한 지식인이다. 아내가 있지만 스위스에서 만난 사비나가 혁명의 중심지 체코에서 왔다는 이유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위의 인물 소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벼움,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움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작품은 네 인물의 성격과 관계를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테레자와 토마시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 무수히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으로 나뉜다. 책임감정의로움진지함 등을 선택할 것인지, 자유로움배신유머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토마시는 육체적 행위와 영혼의 사랑을 별개로 생각하고, 책임을 지는 삶을 싫어하지만 테레자는 영혼의 사랑만을 갈망하며 그 책임감을 열렬히 원한다.


사비나는 토마시와 같은, 어쩌면 토마시보다 더한 가벼운 관계를 즐긴다. 책임의 'ㅊ'자도 싫어할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에게 오겠다는 프란츠를 부담스러워하며 떠난다.


영화에서도, 원작인 책에서도 잘못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의 방식에 있어서 가벼움과 무거움 중 무엇이 맞는지에 대한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존재와 키치의 의미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마치 에세이를 써내려간 듯처럼 보이는 소설이다. 이는 밀란 쿤데라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존재의 의미와 삶의 무게, 키치의 의미 등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원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원제는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이다. 이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번역되었지만 직역하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무엇이 앞에 오느냐에 따라 중심이 달라진다.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는 뜻이다.


원제의 뜻을 파악하면 그 이후엔 인물들의 삶의 방식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토마시가 느꼈던 지식인으로서의 무력감, 육체적 행위만이 아닌 영혼의 사랑을 갈망한 테레자, 키치를 혐오하지만 결국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비나, 사비나에게 빠졌지만 실은 혁명의 새로운 무거움에 빠졌던 것뿐인 프란츠. 이 네 남녀는 모두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결국 ‘존재의 참을  없는 가벼움’이란 사회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무거운 것들에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것들이 배제되면서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인간의 존재성인 것이다. 결국 이 존재의 가벼움은 인물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커다랗고 무거운 굴레가 된다.



사비나와 프란츠



또한 소설에서는 존재 이외에도 ‘키치’의 의미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키치(Kitsch)의 사전적 정의는 대량생산된 싸구려 예술품을 뜻하지만, 여기선 ‘대중에게 맞게 획일화된 속물적 양식·규제·사상이라는 뜻에 가깝다.


소설에서는 키치를 혐오하지만 결국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예술가의 삶의 모순을 사비나를 통해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키치란 단어는 가볍게 한 두 번 정도 등장하고, 그마저도 사비나의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로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원작의 주제를 관통하는 단어이지만 영화는 원작의 많은 주제들 중 가장 큰 대주제 하나만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사랑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중성이다. 소설에 비해 영화는 제작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또한 아무리 긴 장편 영화더라도 장편 소설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기란 어렵다. 소설의 내용을 시나리오로 옮기려면 각색이 필요하다. 그래서 감독과 작가는 대중의 흥미를 위해 문학에 없었던 세부 플롯을 추가하거나, 분량에 맞추기 위해 일부 장면을 없애기도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를 외면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아마 밀란 쿤데라도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해하기 힘들었으리라 예상해본다.

영화는 원작에서 다뤘던 정치, 철학, 사랑 문제를 세세히 다루지 않고 서로의 사랑 방식이 변해가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서사적 장면으로 연출하는데 힘썼다. 차이를 이겨내고 연인으로서 끝까지 함께 동행하는 모습은 토마시와 테레자로, 차이를 감수하지 못하고 헤어진 연인의 모습을 사비나와 프란츠의 이야기로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원작 소설에 있던 가벼움과 무거움의 의미를 가진 여러 상징들은 영화에서 사랑방식과 삶의 유형에 있어서의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축소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영화 후반부 토마시와 테레자의 마지막 모습은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고 아름다웠던 장면이기도 하다. 이미 그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앞서 사비나를 통해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골마을에서 한 파티를 갔다가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테레자가 운전 중인 토마시에게 묻는다. ‘지금 무슨 생각해?’ 토마시는 대답한다.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스크린은 하얀색으로 빛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들은 과연 자신들의 죽음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했을까? 검은색이 아닌 하얀색으로 내려간 스크린처럼 그들의 인생도 차차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차차 밝아진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찬란한 마지막이 아닐 수 없었다. 굉장히 많은 여운을 남김과 동시에 영화에서만   있는 연출의 을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었다.



영화 초반부에 “삶을 두 번 살 수 있다면 첫 번째 생엔 이렇게, 두 번째 생은 저렇게도 행동해보겠지만 인생은 한 번뿐이기에 그럴 수 없다”는 토마시의 대사는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사실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믿고 있는 가치이다. 물론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고, 오로지 한 번뿐이라는 것. 그렇기에 삶의 무게는 정해진 바가 없으며 누구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고민하며 살아간다는 것. 한 번 사는 인생이기에 가볍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지, 무겁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아직도 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해왔으면서도 또 고민하게 될 것이다. 때론 무거워져야지, 또 어떤 때는 가벼워져야지 하면서 말이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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