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으로부터의 고통&타인으로부터의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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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으로부터의 고통 :
사람은 두 번 없을 단 한 번의 태어남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고통은 대부분 나와 같은 사람에게 겪게 되기도 합니다. 나와 같은 얼굴을 가진 그대들에게 깊고 얕은 고통을 주고받으며 애써 가면이라는 안식처 속에 숨어버립니다. 고통이라는 감정은 많은 감정의 아픔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너무나도 주관적인 이 감정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지옥보다도 더한 나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더 돌이킬 수 없는, 타인에 관한 관심으로 넘쳐납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 주의를 희곡 <닫힌 방>에 담아내면서 그 유명한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라는 대사를 만듭니다. <닫힌 방>은 신문기자 가르생, 남편을 죽인 이네스, 매춘부 에스텔이 사후(死後) 한 방에 갇히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세 명의 주인공들은 첫 만남에 의식하면서 가식적으로 자신의 체면을 지키지만 닫힌 방속에서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이 왜 이곳에 오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차근차근 짚어보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형리가 되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던 공간에서는 어느덧 타인을 판단하고 감시하는 장소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런 시선이 따가워지자 괴로움을 견딜 수 없게 되자 가르생은 끝내 이렇게 말합니다.
“(중략) … 나를 잡아먹는 이 모든 시선들을…. (그가 갑자기 뒤돌아선다) 이런! 당신들 둘밖에 안 돼? 난 당신들이 훨씬 많은 줄 알았지 뭐야. (그가 웃는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타인이 주는 시선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겠지만 우리는 이 한 대사만으로도 아픔을 느끼며 많은 여러 갈래의 의미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정해진 본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체적 자유를 가졌지만, 타자가 실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멸시하고 괴로워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실존도, 삶도 돌이킬 수 없는데 타인의 시선은 따가울 정도로 가깝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 속에 갇힙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곧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타인의 마음 유형을 추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타인의 마음을 직접 파악할 수 없으니 타인이 처한 환경과 행동을 토대로 자신의 기준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마르셀 뒤샹의 유언이자 묘비명이 생각납니다.
"게다가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야.“
그에게는 언제나 타인이 자신에 대해 붉으락푸르락했기 때문에 타인이라는 지옥에도 무덤덤했을 겁니다. 마르셀 뒤샹을 현대미술 시초의 정점으로 찍게 해 준 <샘>이라는 작품 일화를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17년에 개최한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는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미술전이었는데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소정의 수수료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셀 뒤샹은 동네 철물점에서 흔히 취급하던 남성용 변기 하나를 산 뒤 ‘R. Mutt’라는 가명으로 출품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독립미술가협회에서 거부당했고,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후미진 곳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마르셀 뒤샹은 자신이 발간하는 다다이즘 잡지 <The Blind Man>에 R. Mutt라는 작가를 옹호하는 척 글을 투고했습니다.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머트 씨의 작품 <샘>은 부도덕하지 않다. 배관 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1).“
스스로 선택한 그것들에 관한 결과가 고작 타인과 비교하는 대상의 전락 물로 변모한다면, 타인의 평판과 걱정 속에 갇혀 버린다면 더 날아오를 수 있는 하늘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우리에겐 예술도 모든 것들에 대한 의미도 없을 겁니다. 예술가는 자신이 선택한 주제, 그리고 철학과 본질을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활황(活況)할 수 있도록 부단히 애를 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라고.
타인으로부터의 배움 :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트르트의 메시지에 힘입어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혹독한 현대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매일 무의식적으로 정보를 얻고 살 닿는 것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웁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이 <두 번은 없다>에서 썼듯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 훈련 없이 죽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훈련 없이 나도 모를 새 죽어버린다면 내가 겪어왔던 고통을 어떻게 잦아들 수 있게 하는지 배움을 통해 찾아보는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 모든 것들과 대처 없이 헤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고하고, 고민하고 매 순간 사랑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타인이라는 틀에 벗어나 조금 더 날 위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인생은 배움과 회답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기억하고 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꿈틀거리다 눈을 뜨고 사물의 모든 면이 신기할 때쯤 기어코 걸음마를 배우고 소통하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계속해서 터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우리는 인간에게 동화되기 위해 끊임없이 배웁니다.
우리는 가족에게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연습하고 교육기관에서 타인들과 어울리고, 예의와 존중, 그리고 배려 같은 교양을 배웁니다.
우리는 교육에서의 배움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타인의 경험 혹은 의도에서 배우는 과감함은 모험과 같으며 고통은 자신의 한계를 승화하는 위대한 시도입니다.
1960년 독일,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이라는 피아노 연주를 선보이던 백남준 작가는 공연 도중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석에 앉아있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느닷없이 잘라버렸습니다. 오랫동안 회자하는 이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굉장히 무례하지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물의 용도를 다양하게 확장한 의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입니다.
넥타이는 목에 매는 거라고, 그게 ‘맞는 일’이라고 모든 사람이 말할 때 백남준 작가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로마 시대부터 넥타이는 힘과 권력을 상징했다. 나는 남자들이 늘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의도를 담은 퍼포먼스였습니다.
서구문화권에서는 힘과 권위, 예절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이 행동은 굉장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배울 수 있는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이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끌어온 것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러운 쇼를 하는 것이다.”
2015년,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백남준 작가의 전시 <백남준 그루브 흥>에서 작가의 철학이 담긴 16가지 이야기 중 내 마음속 고이 간직하고 있는 대목을 발췌했습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받으려고, 혹은 타인으로부터 무언가의 보상을 기대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본질에는 개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는 이들이 이를 통해 더 단단하고 강해질 수 있도록 그들은 그들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이 고통스럽다고 무섭다고 피하거나 눈치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이 내 세계를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세계는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수많은 예술가의 삶을 엿보고 있노라면 타인으로부터의 고통, 환멸, 시기 같은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꽃은 타인의 시선에 의식해서도 아니고,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닌 자신의 존재로 남습니다. 자신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된다는 것. 타인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모습. 고통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기까지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노력을 해야 할 때입니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사라질 때까지.
(1) 사진2 참조
(2)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1421562
글 아트렉처 에디터_안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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