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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Nov 30. 2018

흰 옷과 백자

흰 옷과 백자


커다란 방 한 켠에 놓인 소박한 백자 항아리는 어딘가 마음을 놓이게 만든다. 방이 클수록 공간은 무언가 채워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손님이라도 오면 값비싼 가구들을 보여줘야 할 것 같기도 하니까. 그러나 흰색의 항아리는 그 자체로 족하다고 말해준다. 약간은 모자라고 투박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손님마다 웃으며 맞이한다.


백자 달항아리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알랭 드 보통은 백자의 아름다운 이유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백자 달항아리에 대해, ‘겸손의 미덕에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항아리는 표면에 작은 흠들을 남겨둔 채로 불완전한 유약을 머금어 변형된 색을 가득 품고, 이상적인 타원형에서 벗어난 윤곽을 지님으로써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다. 가마 속으로 뜻하지 않게 불순물이 들어가 표면 전체에 얼룩이 무작위로 퍼졌다.’

-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달항아리의 색은 완벽하게 깨끗하지는 않다. 그러나 달항아리의 색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백자는 그 무늬가 있기에 뛰어난 작품이 된다. 약간은 뒤틀린 형태, 그을린 얼룩, 작은 반점들. 가마 속 흔적은 하나하나 모두 가치가 있다. 이 아담한 항아리는 자기만의 무늬를 가졌다. 똑같은 백자 항아리는 없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은 전시실 한 켠에서 빛을 뿜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을 버티어 정상에 오른 뒤에는 항아리는 뽐내지 않고 조용히 침묵한다. 이처럼 겸손하고 자비로운 백자를 탐내지 않을 사람을 없을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는 뜻을 이루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위안을 준다. 과거에 우리의 조상들도 늘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근면성실과 끈기란 그들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샛별을 보며 일어났고, 농사일과 집안일로 쉴 틈이 없었다.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 조심했고, 인간의 운명에는 하늘의 뜻이 작용한다고 믿었다. 백자에는 이렇듯 하늘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뜻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백의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자를 보고 있노라면 백의민족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흰색을 즐겨 입었다.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 방문했던 외국인은 한국인이 전부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이 흰 옷을 즐겨 입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밝고 깨끗하고 우아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의복 생활에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 상복의 영향으로 흰 옷이 습성화되었다는 주장, 유채색의 옷을 입지 못하게 한 국가의 금령으로 인해 백성들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 물감이 희귀하고 염료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등등. 그러나 그 이유야 어떻든 흰옷이 우리 민족의 성정에 맞았고, 우리 민족이 즐겨 입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 정수현, <손맛으로 보는 한국인의 문화>


물론 흰 옷이 실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때 조정에서는 쉽게 더러워진다는 이유로 흰 옷을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크게 반발하고 끝끝내 흰 옷을 고집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반감만 사고 말았다. 백성들에게 흰 옷이 문화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도 으니까.

흰 옷은 과연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과거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장군은 ‘백의종군’ 한다고 했다. 벼슬에 있지 않고도 영향을 미치는 정치가는 ‘백의정승’이라 불렀다. 백성들이 입는 옷은 ‘백의’라 했다. 선비들이 입는 옷도 옅은 옥색이나 흰옷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흰 옷은 소박하고 담백하고 무난한 색이었다. 또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반영하기도 했다. 흰 옷을 입은 백성들은 마음을 단련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농민 운동 때도, 전쟁 당시에도 사람들은 흰 옷을 입었다. 저항군은 흰 옷을 입으며 다 같이 한 마음으로 단합되는 기분을 느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이 된 것처럼 여겼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에서도 다 함께 노력하고 있다고 자각했다. 이처럼 흰 옷은 평범한 사람들이 위대한 선택을 하도록 했다.


달항아리와 흰 옷은 표백한 듯 차가운 색이 아니라 따스하고 인간적인 색이다. 이러한 색은 친근하고 포근하지만, 내면에는 강한 인내와 끈기를 간직하고 있는 색이다. 박물관의 거대한 전시실 안에 자리 잡은 달항아리는 무심한 듯, 보이지 않는 파장을 빈 공간에 일으킨다. 마치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뜻이 자연에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듯. 전시실에 오는 사람들에게 항아리는 모든 사람이 화려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매일의 선택에 따라 또 다른 미래를 일궈낼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이에게, 신념을 버리지 말고 굳세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





아트렉처 에디터_양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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