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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Jan 28. 2021

이것과, 이것이 아닌 다른 모든 것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 장재철
 

 서양화가 장채철에게 캔버스는 가장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가 된다. 보통 화가들이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린다면, 장채철은 그림 대신 캔버스를 특별하게 바꾼다. 회화의 도구로 쓰이는 캔버스가 그 자체로서 예술의 완성에 닿아 있다.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은 대작부터 소품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절제되어 있고 유쾌하다. 절제되었지만 유쾌? 언뜻 봐서 짝을 이룰 것 같지 않은 두 갈래의 인상비평이 장재철의 회화 작업에서는 통한다. 색과 도형과 부피감에서 그렇다. 그는 하얀 사각의 캔버스를 새롭게 고안(re-design)한다. 알록달록한 원색과 이에 상응하는 흑과 백, 네 개의 꼭짓점만 남아 정적분 기하학으로 크기가 측정되는 사각형, 부조처럼 벽으로부터 튀어나온 양감, 이와 같은 요소들은 쾌활하고 열정적인 감정을 모더니즘적인 태도를 통해 차갑게 억누르고 있다.


장재철, Time space, canvas Relief, 49 x 49 cm, 2013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십 번의 붓질이 더해짐에도 도무지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 게 그의 작품이다. 그렇다고 그 그림들이 현대 회화사 속에서 오로지 유일무이한 성취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캔버스 위에 그림 그려진 것이 회화라는 관념 구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그의 미술은 새로움을 향해 있다. 세상의 다른 그림들과 다른 장재철 본인만의 작업은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차이로 인하여, 회화가 가지는 본질에 다가서는 역설의 진리를 제공한다.


 현대 예술의 테두리에 속한 작가라면 누구라도 그렇다. 자신은 남들과 구분되는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한낱 예술가 자신을 포장하는 선언적인 의미가 아니라 형식과 내용에서 뚜렷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차이는 곧 형식이 된다. 예술가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구별 안에서 어느 한 쪽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구별은 완전한 자기 통제다.”(조지 스펜서 브라운 George Spencer Brown) 형식으로 구별된 차이는 관찰을 통해서 확인된다.


장재철, Time space, canvas Relief, 29 x 214 x 20 cm, 2013


 이것은 역설을 포함한다. 작가 장재철은 자신의 캔버스 작업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 사람들은 바로 회화를 준거로 삼는 관객이나 비평가, 혹은 동료 화가들이다. ‘내가 하는 것은 그림 그리기가 아니지만 이것은 그림이다’라는 식의 형식논리가 장재철의 작품을 규정한다. 미술에 정통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그의 작품이 장식품으로 볼 뿐이지 그림으로 볼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 혹은 경계선 위에 놓인 유희는 현대 미술의 한 단면이면서, 장재철의 작업이 가지는 매력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만이 구획 지워놓은 공간 속에서 다른 회화 양식과 차별되는 표식을 끊임없이 새기고 있다.


장재철, Time-Space, Canvas relief, 125 x 110 cm, 2010


 한 때 모더니즘 미술의 극단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색 캔버스까지 치달았다면, 장재철은 평면 미술의 기본 요소들을 구성하는 형식으로 현대성의 기획을 이어간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그의 그림에는 형상이 생략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캔버스의 변형이 형상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 앞에서 그 생략된 부분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생략된 것 대신 추가되거나 강조된 것은 무엇인가? 아니면 생략된 부분이 실은 어디에 포함되어 있는가?


 세밀한 공정에 의해 이루어진 극단적인 명료성은 사각의 캔버스에 대한 강박관념과 같은 모티브에서 벗어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다양한 이미지를 연상하게끔 한다. 이를테면 조립식 블록 장난감, 지도의 등고선, 접어놓은 색종이, 퍼즐 조각이 그것이다. 그 외양이 어떻던 작품 이미지는 우리들의 경험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물성이나 조형성을 패턴으로 배치한 결과다. 물론 작품의 의미가 많은 예술가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헤겔식의 정신성처럼 형이상학적 수준에서 부유하는 차원은 아니다. 또한 그것이 작업 과정을 득도(得道)하는 단계처럼 신비화하는 최근 미술의 흐름과도 큰 관련은 없다. 역설적이게도, 이 모두를 제외한 형식적 부정의 총합으로 드러난 작업은 경쾌한 공간감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아름다움에 연관된 지식과 이야기를 떨쳐내 버리면서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끌어 냈다.





글 |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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