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들어 날씨가 계속 흐리다. 약간이지만 싸락눈도 몇 번 내렸다. 첫눈으로 인정하기에는 좀 억울한 양이라 무시했다. 그런데 오늘 오전부터 동네가 제법 하얗도록 눈이 내린다. 조카가 한국으로 돌아가자 날씨가 추워져서 조카한테 '네가 미국의 온기를 다 가지고 갔나보다'고 농을 했다.
뉴욕과 시카고를 여행할 때 11월인데도 기온이 20도를 웃돌았다. 뉴욕과 시카고는 추우니 겨울 옷 잘 챙겨오라고 했기에 조카는 겨울용 두꺼운 점퍼만 챙겨왔다. 그러나 예상외로 날씨가 포근해서 조카도, 나도 겨울 점퍼를 벗어서 들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날씨가 이번 주 들어 돌변하여 초겨울의 쌀쌀함을 보이더니 갑자기 눈이 내린다.
길거리에는 낙엽이 담장처럼 쌓여 있다. 올 가을은 나에게 없는 계절이 되었다. 9월 말에 한국을 갈 때 애크론은 단풍이 한창이었는데, 내가 돌아오기 전 절정기를 지나 모두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10월 중순까지도 한국에는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었다. 이래저래 가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동네 여기저기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낙엽들을 볼 때마다 나무들은 이 많은 잎들을 어떻게 매달고 있었을까 의아할 정도이다. 이 낙엽들은 12월이 되면 전부 수거가 되어 거름으로 바뀌어 내년 봄 새 생명들을 키워내는데 쓰일 것이다.
오늘 아침 산책을 하며 한 집 앞을 지나는데 "자연의 삶을 위해 잎들을 놔두자"는 피켓이 꽂혀 있었다. 떨어진 잎은 겨울 동안 얼었다 녹았다 하며 자연스레 곰삭아서 내년 봄에 자기들이 매달려 있던 나무의 거름으로 쓰일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회란 이 자연스런 순환과정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그것에 사람의 손을 보탠다. 굳이 공장에서 발효제를 섞어가며 거름으로 만들지 않아도 내년 봄이 되면 낙엽은 썩어 자연스레 거름이 될텐데, 도시 생활이란 것이 이 과정을 그냥 두지를 않는다. 숲 속의 나뭇잎은 눈, 비, 바람을 맞으며 곰삭을 것이고, 겨울 혹한에는 이불처럼 나무 뿌리를 보호하여 주는데, 도시에서는 쌓여있는 낙엽이 허용이 되질 않는다. 이 집 혼자 이 피켓을 꽂고 있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평소 꽃을 많이 가꾸는 한 집에는 눈이 내리는 날에도 빨간 꽃이 피어 있다. 웽하니 스산스러운 초겨울 분위기에 홀로 빨갛게 피어 있어 눈에도 금방 띄지만 이 추위 속에 피워 주어 고맙다. 이 꽃은 나비도 벌도 없는 이 계절에 왜 꽃을 피웠을까. 어떻게 씨를 만들까?
산책 길에 자주 지나다니는 또 다른 집 정원에는 목련 한 그루가 부러져 있었다. 봄이면 자색 목련을 피워서 멀찌기에서도 목련이 보이면 내내 꽃을 바라 보며 걸어와 경쾌하게 그 집 앞을 지나곤 했다. 그런데 무슨 사연인지 이 목련이 부러져 있었다. 주인이 일부러 잘라낸 것인가 했는데, 부러진 나무 상태를 보면 잘라낸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누군가 술에 취해 자동차로 그 댁으로 침범하여 나무를 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가 산산이 조각이 나서 부러져 있고, 집 앞 인도 잔디밭과 정원 잔디밭에 차 바퀴자국이 깊게 나있었다.
잎을 다 떨군 나무들 중에는 나무에 기생하는 덩굴 식물이 둥치를 빼곡히 감고 있어 마치 긴팔 옷과 긴바지를 입고 있는 것 같은 나무도 있다. 겨울을 나려고 자신의 잎마저 다 떨구어낸 나무에 다른 생명체가 깃들어 자신의 양분을 빨아먹을텐데, 그럼에도 한 켠을 내어주는 나무를 보면 품이 참으로 넓다는 생각이 든다.
새싹 돋고 풍성한 잎을 피워내는 봄과 여름, 화려한 색으로 변신하는 가을의 나무도 좋지만, 잎을 다 떨구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나무도 좋다. 센 바람에 눈이 수평으로 날리며 내리는 모습을 보니 애크론다운 겨울날씨가 시작된 듯하다. 따뜻한 방에서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는 이 여유가 참으로 편안하다. 이제 겨울 차비가 다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