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에 담아낸 실존주의 철학
오랜만에 클리블랜드 미술관(미국 오하이오주 소재)에 나들이를 했다. 3월 4째주 일주일간 남편의 학교는 봄방학이었다. 학기 중에는 남편이 바빠서 가까운 미술관 나들이도 부탁을 하지 못하는데, 마침 봄방학이라 나들이겸 같이 바람쐬러 가자고 청을 했다. 마침 미술관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시회 (3월 12일 ~ 6월 12일)를 얼마전 오픈을 하여 보고 싶었던 참이다. 주중에 갔더니 관람객이 많지 않아 여유롭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마스크는 착용하고 관람했다.
자코메티(1901~1966)의 작품은 한국에 살 때에도 자주 보았다. 미국에서도 미술관들을 관람하다 보면 자코메티 작품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적 이미지인 길게 늘인 깡마른 인체 조각상을 워낙 많이 보았던 터라 이미 잘 알고 있는 예술가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담아낸 이번 전시를 보고 나니 그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하물며 이탈리안이라 생각했던 그는 스위스인이었다.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그의 개성을 만들어 갔는지, 어떤 사람과 교우관계를 맺었으며 조각 외에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의 명성이 만들어졌는지 등, 그에 대해 전체적인 조망을 해 볼 수 있는 전시였다.
이 글은 자코메티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나처럼 그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사람들을 위해 전시 내용을 충실히 옮기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영어로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한국말로 옮기려니 능력의 한계가 드러난다. 매끄럽게 번역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엉성한 부분도 있으니 감안하시면서 글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Alberto Giacometti: Toward the Ultimate Figure"이다. 이번 전시는 2차 대전 이후의 시기, 특히 1945년 부터 그가 사망한 1966년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시그너쳐라 할 수 있는 마르고 길게 늘여진, 표면이 거친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기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실존철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2차 대전을 겪은 유럽인들에게 인간조건에 대한 의문이 왜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소외, 두려움, 무가치함, 불확실성 등 2차대전과 그 이후 뒤따른 냉전시기에 나타나는 이러한 철학적인 질문들이 그의 깡마른 인체에 반영이 되었다. 마치 풍화작용을 거친 것 같이 납작하고 편편하게 본질만 남기고 잡다한 것을 다 떨구어 낸 부서질듯한 작품들을 통해 그는 당시의 예술과 인간성이 직면하고 있던 심각한 위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자코메티는 1901년 스위스의 Stampa에서 태어났다. Stampa는 이탈리아 국경과 불과 3마일(4.8km) 떨어진 곳으로 스위스 남동쪽의 산속에 있는 인구 약 400명이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어린 시절에 후기 인상파 화가로 유명했던 아버지 지오반니 자코메티(Giovanni Giacometti, 1858~1933)에게서 드로잉과 그림을 배웠다. 13살 무렵 부터 조각도 시작했다.
1922년 (21살)에 프랑스 파리에서 앙투안 브루댕에게서 조각을 배웠다. 1926년 (25살)에 파리의 몽파르나스에 스튜디오를 열고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큐비즘과 아프리카 예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1929년 (28살)에는 초현실주의에 가입했으나 초현실주의의 리더였던 앙드레 브루통과 논쟁을 하며 1935년 (34살)에 탈퇴하였다.
1941년 나짜가 파리를 점령하자 파리를 떠나 스위스로 돌아가서 지내다 1945년에 다시 몽파르나스로 돌아왔다.
그의 몽파르나스 스튜디오는 1926년 그의 나이 25살에 입주하여 1966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작업을 하였다. 이 작업실은 크기가 겨우 5m X 5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지붕은 새고, 화장실은 공용 화장실 하나 뿐이었으며, 겨울이면 추워서 작품이 얼곤 했지만 그의 대표작들이 이 스튜디오에서 쏟아져 나왔다. 당대를 선도하던 지식인들, 작가들, 예술가들이 이 스튜디오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그가 죽고 나서 벽에 칠한 석고에 그가 그려놓았던 그림들은 아내 아네트가 뜯어내어 보관하였다.
그 시기의 대부분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코메티는 살아있는 모델을 드로잉하고 조각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의 경력 초기에는 두상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초현실주의에 가입해 있던 동안에는 기억, 꿈, 환영에서 영감을 받은 창조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델 작업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리더였던 앙드레 부르통과 논쟁에 불이 붙었고, 그로 인해 그는 초현실주의를 떠나 1935년 다시 모델링 작업으로 돌아왔다. 이후 10여년간 집착하다 싶이 작은 사이즈의 두상과 조상(figure)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당시에 대해 "나는 몇달 간 같은 머리들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매일, 모든 사이즈로, 조금씩 모든 것을 제거해 나가며, 모든 것의 핵심이 담긴 단 하나의 머리에 도달할 때까지" 라고 회고했다.
자코메티는 인물과 주변 공간과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조상에서 어떤 서사나 이야기도 제거하여 가장 본질적인 것만을 남겨둠으로써 그의 조상이 마치 멀리에서 본 것 처럼 보였으면 했다. 부서질 듯한, 고립된 조상은 마치 태고의 우주적 존재처럼 영원 속의 익명인처럼 보였다. 자코메티는 1940년대 말와 50년대에 이 컨셉을 발전시켜 어떤 각도에서 보면 거의 형태가 사라져 보이도록 극도로 마르고 긴 형태로 형상화하였다. 그의 작품은 점점 더 비물질화되어 거의 사라질 것 같았다. 마치 우리의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사람처럼 그의 조상작품들은 떠도는 유령같은 존재로 보였다.
면도날처럼 납작하고 편편하게 눌려 물질성을 털어낸 두상 조각은 앞에서 보면 형체가 거의 사라져 버리는데, 이는 조상을 무력화하고 해체하여 무로 환원하려는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조상에 대해, 자코메티의 조상작품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암시하는 동시에, 보편적 경험을 초월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다고 논평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얼핏 보면 우리는 Buchenwald(* 나치의 강제수용소였던 곳)의 희생자들에 대립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는 꽤 다른 개념을 갖게 된다. 이들 가늘고 호리호리한 자연이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고, 우리는 이 인물들이 승천하고 있음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 이 마른 몸체들이 확장한다는 신비스런 믿음을 갖게 될 때,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땅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자코메티는 조각의 받침이나 대좌를 조각의 필수적 요소로 보고 새로운 창작적 요소로 활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조각의 받침이 작품의 토대로 사용되는 것에 반해 자코메티는 조상과의 관계에서 대좌가 가지는 크기, 규모, 위치를 역전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어떤 작품은 실제 조상보다 작품 받침이 훨씬 더 크다. 그는 여러층의 반석을 쌓아 올림으로써 아주 작은 조상에게 조차 엄숙함과 장엄함을 부여했다. 마르고 수척한 조상을 받침이나 대좌 위에 고정하는 상반적인 힘을 사용하여 점진적으로 비물질화로 향하였다. 몸에 팔을 단단하게 고정한 채 공간에 고정되어 있는 자코메티의 조상을 보고 있으면 그가 찬미하던 고대 이집트 예술의 특징인 근원적인 존재와 영원성의 감성을 포착하게 된다.
자코메티는 조상(figure)작품으로 유명하지만 또한 풍경화도 스케치하고 그렸다. 그의 초기 작품으로 대담한 컬러로 그린 알프스의 풍광은 뛰어난 후기 인상파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나중에 자코메티는 그의 풍경화 쟝르와 인체를 재현하는 작업을 융합하였다. 그의 1950년 작품인 조각 <The Forest and The Glade>는 넓은 좌대 위에 세워진 여러 개의 키 큰 인체들을 보여주는데, 이는 초지나 산의 빈터에서 자라는 나무와 야생 식물들을 연상케 한다. 또한 그의 조상의 얼굴과 몸은 풍경화의 바위산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한 회화 작품에서 작가는 얼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얼굴이 산과 계곡이 얽혀있는 풍경화라면, 코는 셀 수 없이 많은 바위로 구성된 거대한 산이다."
단어 "glade(숲속의 빈터)"는 알프스 숲에 있는 빈터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자코메티는 이 조각에 대해서, 숲의 끝에 있던 숲속 빈터, 또는 "초지가 야생지로 바뀌어가는" 곳에 맏닥뜨렸을 때 느낀 기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썼다. 여기 9개의 칼날 처럼 가느다란 여성들이 키큰 풀들이나 야생화처럼 낮은 바닥에서 일어서고 있다. 이 조상들은 빛으로 충만한 풍경에서 나타난 젊은 숲의 님프로 해석되었다. 이들은 또한 자코메티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스케치했던 선사시대의 키클라데스의 조각(* 그리스 에게해에 있는 섬들)들과 이집트의 풍요의 신들과 비교되곤 했다.
자코메티는 바위 투성이 땅에 솟아 올라 있는 암석덩어리 산의 풍경을 보는 것처럼 이 흉상의 몸을 제작했다. 그는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산과 계곡이 어울어진 풍경을 그리는 것과 같다. 코는 셀수 없이 많은 바위로 만들어진 거대한 산이다." 라고 말한다.
자코메티의 명성이 세계로 퍼져 나가는데는 사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 레이와 로기 앙드레가 1930년대의 그의 기념비적인 초상화를 찍었고, 로베르 드와노, 고든 파크스, 아놀드 뉴만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스튜디오에 있는 그의 작품들과 함께 한 그를 촬영했다. 국제적으로 유명했던 사진가 어빙 펜과 리차드 아베든이 1950년대의 자코메티의 뛰어난 초상화 사진을 남겼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지젤 프로드(Gisele Freund)와 유서프 카쉬는 쟈코메티 인생의 마지막 10년동안 쟈코메티의 강렬한 이미지를 포착해 냄으로써 그의 명성이 커져가는데 일조했다.
좌: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la Rue d'Alésia를 가로지르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1961 / 우: 유서프 카쉬, <알베르토 자코메티>, 1965
1964년 스위스의 화가이자 사진가 에른스트 샤이데거는 쟈코메티가 파리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장면을 포함하여 그의 다큐를 찍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6년에는 25분짜리 영상으로 완성하였으며, 1998년에는 50분짜리로 상영하였다. 쟈코메티 스튜디오를 자주 찾는 방문객이었던 샤이데거는 쟈코메티와 그의 작품에 대한 사진 전집도 제작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8분짜리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1940년대 후반, 자코메티의 예술은 실존주의 - 흔히 인간의 조건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으로 묘사되는 - 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실존주의란 우리가 경험하는 불안, 혼란, 소외 등, 비록 개인적인 노력으로 이 힘들에 저항할 수 있지만, 이 비상식적인 우주에서 우리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함을 주장한다. 자코메티는 1930년대 후반 실존주의 철학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쟝-폴 사르트르를 만났다. 1948년 뉴욕에 있는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열릴 자코메티의 전시를 위해서 쓴 에세이 "추상주의에 대한 연구" 에서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길게 늘여진 조상에 대해, "무와 존재 사이의 중간, 언제나 수정되고, 부서지고, 파괴되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마침내 자기 자신 위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 글은 자코메티의 명성을 드높였고 실존주의 -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 철학인 - 의 맥락 안에 그의 자리를 확고하게 매김했다. 자코메티의 인간의 조건의 본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보편적 예술을 향한 연구는 금속 새장에 갇힌 또는 텅빈 도시광장을 통과하여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 빼빼 마른 조상 조각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The Nose>는 자코메티의 작품 세계가 왜곡되고 길게 늘여진 표현적인 조상 작업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실제 사건과 꿈, 환영이 복합된 작품이었다. 그는 하나의 사건을 겪는다. 그가 살던 몽파르나스 주택의 옆 방에 살던 남자의 죽음이었다. 자코메티는 새벽 세시에 침대에 축 늘어진 시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머리는 뒤로 젖혀져 있었고, 입은 벌어져 있었다. 이 기억을 자코메티는 금속 새장에 부착된 로프에 매달려 있는 머리라는 섬찟한 이미지로 작품화하였다. 이 그로테스트하게 왜곡된 코는 관람자의 공간을 향해 불안하게 뻗어나와 있다. 유일하게 코만이 새장 밖으로 벗어나 있다.
1940년대 후반 자코메티는 길쭉한 조상 작업을 진전시키는 동시에 텅빈 공간이나 도시 광장을 가로질러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 별개의 다수의 인물들을 구성적으로 합치는 작업도 시작했다. 자코메티는 "거리의 사람들은 그림이나 조각보다 훨씬 더 나에게 놀라움과 흥미를 준다."고 말한다. "매순간 사람들은 모여들었다가 흩어진다. ...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복잡성으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구성력(composition)을 끊임없이 형성하고 또 형성한다. ...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제작하고 싶은 이번 생의 종합판이다."
1940년대와 50년대, 쟈코메티는 새장 안에 갇힌 작은 조상 조각을 시리즈로 제작했다. 이 작고 수척한 조상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외로움, 불안, 소외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새장은 세상과 분리된 육체적 고립을 강조함과 동시에 현대의 삶이 가진 비논리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자코메티는 문학계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썼다. 그는 아방가르드 잡지에 글을 발표했고, 뛰어난 작가들 - 앙드레 브르통,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봐르 - 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0년대에 그는 아일랜드 소설가이자 극본가인 사무엘 베케트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961년 베케트는 자코메티에게 실존주의 철학의 확산을 폭넓게 불러 일으킨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공연을 위한 무대 디자인을 요청했다. 자코메티는 또한 시집의 시화도 많이 그렸다. 그의 서클 멤버인 쟈크 듀팡과 장 지네와 같은 사람을 포함하여 여러 작가들이 자코메티를 위하여 에세이와 글을 출판했다.
자코메티는 자기 주변에서 영감을 받았고, 모델도 자기 주변에서 찾았다. 그러나 몇 일이고 몇 주고 꼼짝 않고 고정된 장소에서 모델을 서 줄 사람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변의 친한 친구나 친척, 자기의 서클 안의 사람들에게서 모델을 찾았다. 특히 그의 동생 디에고와 그의 아내 아네트는 그의 최고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자코메티는 동생 디에고에 대해 "내가 아는 최고의 모델. 그는 다른 누구 보다 훨씬 자주 아주 오랜 시간 나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라고 말한다.
자코메티는 194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던 20살의 아네트를 만났다. 1946년 파리로 이주한 그녀는 자코메티의 몽파르나스 스튜디오 옆방으로 이사를 했다. 3년 후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그녀는 쟈코메티의 최고의 모델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여러 시간 동안 그를 위해 모델을 서주었다. 아네트는 자코메티가 죽은 후 쟈코메티 재단을 설립하여 이 재단을 통해 자코메티의 작품을 보존하고 기록하는데 헌신했다.
인생 말기, 자코메티는 1930년대부터 절친으로 지내온 사진가 엘리 오터(Eli Lotar)의 인생 연구에 영감을 받아 시리즈 조각품을 제작했다. 오터 인지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만 작업이 된 이 작품은 거칠게 작업된 표면과 과하게 축소된 몸통이 조상에게 고양된 감정적 현존을 불어 넣는다. 엄격한 자세로 노려보는 듯한 큰 눈은 자코메티가 찬미하던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예술에 나타나는 영성과 영원성을 느끼게 한다. 자코메티는 이 시리즈에 <New York>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이 흉상들은 1965년 뉴욕의 MoMA에서의 전시를 앞두고 준비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쟈코메티는 그의 회화와 조각에서 언제나 추상과 자연주의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특징은 1940년대 후반의 그의 초상 작업에 나타나는데, 1960년대에 반신상 시리즈 작품을 위해 모델을 섰던 사진가 친구 엘리 오터의 조각에서 두드러진다. 자코메티의 자서전 작가인 캐서린 그레니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질적이며 파라독스한 것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그의 목적은 그가 본 것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충분히 자연주의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추상적이지도 않은 그의 전후의 초상 작품은 그의 서있는 그리고 걷는 조상과 같이 의심과 불확실성의 감정을 주입했다. 몇 해를 지속하며 점점 더 왜곡되어가고 표현주의적인 성향이 커져가는 그의 조각들은 때때로 풍자와 그로테스트를 향하여 나아갔다.
작품 속 주인공은 영화제작자이자 사진가였던 엘리 오터이다. 그는 자코메티의 마지막 남성 모델이었다. 오터는 2차대전 이후 불행을 겪었는데, 자코메티는 그에게 모델을 서게하고 스튜디오에서 그를 돕도록 하며 급료를 주었다. 자연주의와 추상주의 사이의 긴강잠이 충돌하고 있다. 오터의 얼굴은 인물초상처럼 상세하지만 몸의 세부는 겨우 알아볼 정도로만 묘사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다리 위로 녹아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그의 두 손은 하나의 견고한 브론즈 덩어리처럼 보인다.
궁극적 조상(ultimate figures)을 향한 자코메티의 오랜 연구는 전후 큰 사이즈의 서있는 여자와 걷는 남자 조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는 1932년 걷는 여자 조각에서 처음으로 이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 이 아이디어로 다시 탐색하기 시작한 자코메티는 두 개의 확연히 다른 타입 - 서있는 여자와 걷고 있는 남자 - 으로 제작했다. 두개의 상반된 방향으로 조상 작업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는 정지와 움직임, 영원성과 현재성이란 상반된 특징을 강조했다. 가늘고 길며 얇고 빼빼 마른 조상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대리석 조각이 가진 무게감과 영원성에 대한 급진적 거부의 신호가 나타났다. 쟝-폴 사르트르가 말한 것 처럼, "인간의 실체에 가까워질수록 물질은 덜 영속적이고 더 깨지기 쉽다." (이집트 미술은 영원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조각이 둔중했다면, 자코메티의 조각은 인간의 찰나적이고 깨지기 쉬운 실존을 묘사하려고 했기 때문에 조각에서도 영원성을 배제하고 금방이라도 깨질듯하게 조각했다는 의미인듯 함)
1958년 자코메티는 뉴욕시에 있는 체이스 맨하탄 은행 플라자에 세울 조각상을 주문받았다. 프로젝트를 위한 그의 제안은 서있는 여자, 걷는 남자, 남자의 흉상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년이 넘도록 이 조각을 준비했다. 그러나 청동 캐스트에 실망했다. 찰흙으로 새로운 모델을 만든 후 그는 다시 캐스트를 했지만 작품이 플라자에 세워지진 못했다. 아마도 "수직적"인 뉴욕시를 압도하는 크기가 문제였던 것 같다. 조각품과 주변 마천루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문제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들이 여러 전시회에서 전시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이 작품들이야 말로 자코메티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찬사했다. 이 작품들은 자코메티가 추구한 "ultimate figures"로써 그의 시그너쳐 이미지가 되었다.
<서있는 여자 7과 걷는 남자 2>, 1961~62, 석판화, 자코메티는 왼쪽에 키크고 마른 서있는 여성과 오른쪽 아래에 작은 크기로 걷고 있는 남자를 병치하려고 했다. 둘 모두 고립되어 있는 인물로 가장 본질적인 형태만 남겼다.
좌: 석고로 <Walking Man>를 작업중인 자코메티, 1959 / 우: 석고로 <Tall Woman 4>를 작업중인 자코메티, 1960, 에른스트 샤이데거 촬영
<Walking Man 1>, 1960, 브론즈, 실물사이즈로 제작된 이 조상은 보편적인 인물이자 인간의 조건의 특징인 불안과 고독에 대한 실존주의적 믿음을 암시하고 있다.
<Tall Woman 4>, 1960~61, 브론즈, 270X31.5X56.5cm, 받침대와 일체화된 이 조각상을 보면 마치 미술관의 바닥위에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모습은 모호해 보인다. 피부의 질감은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그녀는 은둔자이자 정적인 금욕주의자로 보인다.
이상으로 현재 진행중인 자코메티 전시회의 모든 섹션을 정리했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은 훨씬 많지만 각 섹션별로 몇 작품씩만 소개하였다. 자코메티의 인생에 대해 조망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전시였다.
미술관 홈페이지 : The Cleveland Museum of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