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에 캐나다 국경선을 넘다
3년만에 캐나다의 시댁에 다녀왔다. 코로나 발생 첫해에는 캐나다의 국경이 봉쇄되는 바람에 가지 못했고, 코로나 다음 해에는 외국인의 캐나다 방문이 허용되지 않아서 가질 못했다. 코로나 이후 첫 해외 나들이라 마음이 설렜다.
"국경선"에 대한 느낌
요즘(코로나 전과, 코로나 후인 지금)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졸업까지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을 산 나는 이미 성년이 되고나서야 남의 나라 국경선을 넘어봤다. 그러나 국경선을 넘는다는 것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나라라면 우리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으로 막혀 있으니 가까운 중국도 육로로 국경선을 넘을 수는 없다. 중국을 제외하고 나면 가장 가깝고도 먼나라라는 일본. 이런 일본도 섬나라이니 육로로 갈 일은 없다. 따라서 중국을 가던 일본을 가던 우리는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한다. 다른 나라야 말할 필요 없이 비행기를 타야한다. 그런 상황이니 다른 나라로 여행을 하면서도 해외로 나갔다 온다는 정도이지 남의 나라 국경선을 넘는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한다.
그런데 미국에 살고 있다보니 육로로 국경선을 넘을 일이 더러 있다. 남편이 캐나다인이라 여름방학이나 크리스마스때는 시댁가족을 방문한다. 여름에는 캐나다 동부의 베이(bay)가에 있는 시댁의 캠프(캐나다는 별장을 "캠프"라고 호칭한다)에서 가족이 모여 2주간의 여름 휴가를 보내고, 겨울에는 캐나다의 형제자매 중 한 집에 모여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낸다. 이때는 육로로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국경선을 넘어 토론토로 이동한 다음, 토론토에서 국내선을 타고 목적지로 간다.
처음 남편과 결혼하고 미국에 정착한 후 차로 캐나다 국경선을 넘으며 기분이 묘했다. "국경선"이란 단어가 무척이나 생경했다. 국경선이라고 하면 일제 강점기의 김동환 시인의 <국경의 밤>이 먼저 떠오를만큼 왠지 암울하고 처연하고 구슬픈 이미지가 먼저 연상되곤 했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간의 국경선은 거대한 화물트럭과 양국으로 오고가는 사람들의 차량 물결로 구슬픈 분위기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가 없다. 출입국 심사를 받으려고 길게 늘어선 차량을 보면 설레임과 동시에 얼마나 걸릴까 하는 지루한 감정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렇게 미국과 캐나다간 국경선은 양국을 가르는 경계선일 뿐 암울함과는 거리가 멀다. 동부에서 두 나라간의 국경선 역할을 하는 나이아가라강과 그 강위에 놓인 다리인 Peace Bridge의 중간쯤에 미국기, 캐나다기, UN기가 같이 세워져 있는데, 올해는 UN기는 빠져 있었다.
동부의 시댁 캠프까지 가는 길
일년에 두 번의 캐나다 시댁가족 방문은 코로나 전까지 늘 진행되던 일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발생 이후로는 바로 옆나라임에도 건너갈 수가 없었다. 올해 드디어 3년만에 시댁의 캠프에서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오하이오주에서 이리호 주변으로 난 고속도로를 타고 서북향으로 향하다 보면 오하이오주, 펜실베니아주, 뉴욕주의 3개의 주를 거쳐 드디어 국경도시 버팔로에 도착한다. 이리호 주변으로는 와이너리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와인이라면 서부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미국 동부에도 훌륭한 와이너리가 많이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라면 나아이가라 폭포 주변에서 나는 이니스킬린의 아이스와인일 것이다.
약 4시간여를 달려 국경도시 버팔로에 도착했다. 국경선을 넘기 전 면세점에 잠시 들러 살거리를 조금 사고, 화장실을 다녀온 다음에 국경선을 넘는다. 나이아가라강 위에 걸린 두 나라 사이의 다리 Peace Bridge를 건너면 메이플잎을 상징으로 한 캐나다 국기가 펄럭이는 캐나다의 출입국심사대가 나온다.
약 2시간을 달려 우리가 예약한 토론토 도심의 호텔에 도착했다. 매년 토론토에 가면 친구댁에서 신세를 졌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친구댁에 더 이상 민폐를 끼치지 않기로 했다. 토론토 도심에서 근접한 온타리오호의 작은 섬에 있는 빌리비숍공항 근처로 숙소를 정한 우리는 도심의 빌딩과 사람들을 구경하며 호텔에 도착했다. 도심의 빌딩들과 CN 타워가 멋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 아래를 내려다 보니 거대한 숲과 숲 사이에 나무를 식재하지 않은 곳이 조성되어 있다. 요즘 세계의 한쪽에서는 홍수가, 다른 한쪽에서는 가뭄이 심각한데, 특히 북미 지역은 가뭄으로 인한 산불 피해가 심각하다. 한번 산불이 나면 진화가 어려운데, 캐나다의 숲에는 산불을 대비해서 옆의 숲으로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숲과 숲 사이의 간격을 크게 띄워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캠프에서의 휴가
베이에 자리한 캠프는 풍광이 훌륭하다. 그러나 고향에 사시던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들은 다른 도시에 살고 있어서 그들도 캠프에 자주 방문하지는 못한다. 일년에 여름 휴가 2주동안 가족이 모여 캠프에서 휴식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3~4시간 거리에 사는 형제 자매가 간간이 한번씩 방문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관리가 쉽지 않다. 3동의 나무로 지은 건물은 지은지가 오래되어 매년 여름 가족이 모이면 시간을 내어 수리를 해야한다. 낮시간은 주로 손상된 곳을 손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형제자매들이 점차 은퇴를 하고 계시니 앞으로는 더 자주 별장을 이용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가족은 자주 가지 못하지만 캠프 주변으로는 주택도 있고, 다른 집 별장들도 많이 있어서 모터 보트나 요트, 또는 카누,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모터 보트를 타고 유유자적 천천히 물살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뒤에 수상 스키를 타는 사람을 매달고 강속력으로 질주하는 모터 보트도 있다. 가끔 파티를 하는지 왁자한 소음이 들려오기도 한다.
캠프에서도 남편은 피아노 연습을 하루도 거르질 않았다. 남편은 캠프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에서 허락을 받아 피아노 연습을 한다. 벌써 십수년을 남편은 매년 같은 교회에서 연습을 하는데, 그동안 목사님이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한다. 이번에 갓 부임하신 목사님은 젊은 여성목사님이었다. 인상 좋은 목사님이 어찌나 밝은지 좋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남편은 고향에 올 때면 5살 때부터 대학갈 때까지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던 은사님을 뵈러 간다. 이번에는 나도 모처럼 동행을 했다. 은사님의 방 피아노 위에는 은사님이 가르쳤던 학생들의 사진이 놓여 있는데, 남편의 학창시절 사진은 여러 장 놓여 있었다. 18살에 토론토의 로얄 컨서바토리에서 피아노 솔로 퍼포먼스 자격증을 취득한 미스 오닐은 바로 그해 부터 5살의 나의 남편을 가르쳤다. 두 분의 에피소드를 듣다보면 포복절도할 에피소드들이 많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은 같이 늙어간다.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남편을 불러세운 미스 오닐(평생 독신으로 사신다)은 "휴가중이라도 매일 손가락 푸는 연습은 해!"라고 하신다. 이제는 한참 청출어람이 된 제자인데도 여전히 미스 오닐에게는 당신이 가르치던 어린 제자로 보이시는 것 같다. 나에게도 당부를 하셨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연습 꼭 시키라고. 남편과 나는 은사님의 그 말씀이 너무 좋아서 나오면서 연실 실실거리며 행복했다.
캠프 수리 보수와 땡땡이
올해는 유독 캠프 손볼 데가 많아서 가족 모두 낮시간에 일하느라 바빴다. 나는 초기에 조금 돕다가 슬슬 꽤가 나서 남편 연습갈 때 따라나서서 몇 시간 개인 시간을 보내고 들어갔다. 우리 부부가 머물던 건물을 내내 수리하느라 혼자 잠깐이라도 들어가 쉴 동굴이 없던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을 따라 나가 잠깐이라도 내 시간을 보내야겠다 싶어 남편을 연습하러 갈 때 따라 나가서 연습하는 것도 보고, 연습 후에는 잠깐 펍에 같이 들러 개인시간을 보냈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별장에서는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아무 간섭없이 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규약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다른 가족이 머무는 건물도 수리를 해야해서 3채 중 2채의 건물을 비워 놓은채 모두 메인 켐프에 모여 며칠동안 같이 놀고, 먹고, 자고 했다. 이미 노년을 바라보는 가족들이 모두 한 방에 모여 놀고, 먹고, 자는 경험은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각자의 일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최소한의 옷을 걸친 잠자리에서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 가족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 같이 한 장소에서 지내는 바람에 시누이가 데려온 고양이도 우리와 합류했다. 고양이 멘토르는 모두의 귀여움을 받았다. 시누이는 형제로 태어난 고양이 3마리를 키우면서 3명의 오빠 닉네임을 붙여주었다. 그런데 그 중 2마리는 벌써 저 세상으로 가고 지금은 한마리만 남았다. 모두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었는데, 이제 시아주버님의 닉네임을 단 고양이만 살아 있다.
토론토로 돌아오는 날 아침, 커피 한잔을 만들어 별장 앞 베이에 섰다. 비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과 달리 나는 안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해서 정작 비치에 자주 나가질 않았다. 떠나는 날 아침에서야 자연 속에서 내가 좀 무심했다 싶어서 베이가를 산책하며 잠깐 인상을 눈에 담았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다시 캠프로 갈 때의 길을 그대로 되돌아 몽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토론토로 돌아와 같은 호텔에서 다시 일박을 하고, 다음 날 차로 집으로 돌아왔다. 오전 10시30분에 토론토를 출발하여 오하이오주의 우리집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거의 다 되었다. 토론토의 자동차 정차는 서울 못지않게 대단한데, 구간구간 정차도 되었고, 새롭게 리노베이션한 캐나다쪽 면세점에서 어슬렁거리며 구경도 하고,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주유도 하면서 오다보니 평소 약 6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조금 더 걸려 돌아왔다.
사람 마음이 참 희안하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국경을 넘을 때는 남편의 나라에 왔다는 친근함과 왠지모를 안도감이 들곤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으로 국경을 넘을 때도 친근함이 들었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어느 덧 수 년을 살다보니 내가 사는 곳이란 의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다시 일상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코로나 동안 깨달은 만큼 여행 이후의 일상도 잘 정비하여 열심히 살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