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노 Art Nomad Dec 25. 2024

#43 「This Is Water」 9화

악마를 심판하려면…


놈을 망칠 수만 있다면 은혜는 이백오십 년 동안 그 새끼 똥구멍에 불붙은 양초를 쑤셔 넣을 수도 있고, 귀에 바카디를 쏟아부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졸려도 눈을 감을 수 없도록 눈에 성냥을 끼우고 불을 붙일 수도 있었다.      


그가 잠들려고만 하면 끊임없는 비명을 재생시킬 테다. 그 비명의 규칙이 너무 분명해서 그놈이 익숙해지는 것조차 싫다. 완벽하게 불안한 정신상태를 위해 직접 단전부터 끌어올려 불규칙한 비명을 질러 줄 수도 있다. 그러려면 그놈의 체력을 이겨야 하지만 나는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악마를 심판하려면 자신도 더럽힐 수밖에 없다는 것쯤은 이미 예전에 깨달았다.      


이런 은혜가 간절히 찾던 걸 가지고 있다고 데이빗은 자신 있게 말했다.           



5.          



「바랏 포!」      


한 승객의 세워달라는 말에 지프니가 덜커덩거리며 멈췄다. 은혜는 비좁은 흙길에 도로를 구분하는 경계선도 없는 이곳에서 지프니와 트라이시겔이 기묘하게도 잘 피해 다닌다는 게 신기했다.    

  

다시 출발한 지프니는 심하게 흔들렸다. 그 덕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한 방향과 한 리듬으로 어깨를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다들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코로나 이전에 비하면 사람이 많이 줄었다. 전에는 어깨를 대각선으로 비틀고서라도 부대껴 앉았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필리핀의 버스, 지프니는 번호, 알람, 하차 벨 같은 것이 없다. 기회가 있을 때 타야 했고 필요할 때 소리쳐서 멈춰 세워야 했다. 그래서 비상사태라도 딱 절박한 만큼은 붐볐다.      


포드를 가져올걸.      


은혜는 불편하다기보단 불안했다. 아무리 강단이 센 그녀라도 익숙하지 않은 동네는 두려웠다.      


데이빗의 집에 갔다가 상황이 악화되면 빠져나올 수단이 있어야 했다. 앙헬의 거리에는 택시가 흔치 않았다. 차로 된 택시는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다. 여기선 모두 트라이시겔을 이용했다. 트라이시겔 운전자들은 입이 싸 보였다. 그들은 앙헬레스 어디에나 있고 서로서로 알았다.      


하지만 택시든 트라이시겔이든 만약 상황이 엿같아진다면 사람을 마주치는 것 자체가 위험이었다.      


은혜는 너네 집에 가더라도 차는 가지고 가겠다고 했으나 데이빗이 한사코 안 된다고 했다. 자기 집 근처는 차를 댈 곳도 없으며 아무리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세운다 하더라도 저런 고급 차는 금방 타깃이 된다고. 그의 말투는 꼭, ‘아무리 잘난 척, 아는 척해도 앙헬레스를 전혀 모르시네.’ 하는 지역유지가 외지에서 온 촌뜨기를 다루는 투였다.     


은혜는 흔들리는 지프니에서 핸드백 위로 손을 살며시 얹어보았다. 묵직한 것이 한 손에 안기는 느낌이 났다. 은혜의 손자국을 따라 핸드백의 가죽에 그 형체가 언뜻 보였다.     


「그건 꺼낼 생각도 하지 마요.」      


은혜는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이빗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반사적으로 돌린 은혜의 얼굴에 닿을 뻔했다.     


「알고 있었어?」

「네. 은혜는 티가 많이 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요.」     


은혜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니 지프니 기사 뒷좌석에 붙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은 측은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씨발, 당신이 가르쳐주셨나요? 이 빌어먹을 천주교의 나라.      


은혜는 당장이라도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그런 식으로 이번 앙헬레스 방문을 코미디로 끝낼 수는 없었다. 쏟아져 나오려는 욕을 삼키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속이 시끄러웠다.      


데이빗의 집은 지프니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걸어가는 동안 데이빗은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했다.      


은혜가 속했던 빌어먹을 사기꾼의 알량한 유령회사는 주말이면 직원들 모두 커뮤니티 서비스를 나가야 했다. 커뮤니티 서비스는 구호 물품을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말한다.      


그 경험으로 은혜는 빈민가 사정쯤 안 들어도 알만했지만 데이빗의 사정은 예상보다 더 참혹했다.      


데이빗은 코피노였다.      


그의 엄마는 비키니 바에서 일했다. 데이빗의 엄마는 일하다 만난 한국인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데이빗을 낳았다. 그런 데이빗에게는 어릴 때 수두와 홍역으로 죽은 형, 누나들을 포함해 모두 여덟 형제가 있었다. 형제들의 피부색은 모두 달랐다. 데이빗은 한국어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영어는 완벽했다. 그는 원한다면 어디서든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필리핀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