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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Dec 24. 2024

#42 「This Is Water」 8화

놈을 망치고 싶었다.


은혜는 점점 이 새끼가 무슨 수작을 걸어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자기 집으로 가자니.      


앙헬레스에 자주 왔기에 온갖 희한한 상황을 보아왔다.      


한 번은 머리에 떡칠하고 배만 불뚝 튀어나와 허연 각질이 가득한 발가락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던 삼겹살 무한리필집 사장이 직원들에게 고기를 빨리빨리 갖다 주지 말라고 지랄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무한 리필이라고 버젓이 써놓고서는 빨리빨리 갖다 주지 말라니.      


한국에서 간호사면허를 취소당하고 온 듯한 코 양옆에 선명한 코딱지 점을 가진 약사는 목이 아프다는 데 귀 검사를 하고는 고열이 나는 약을 줬다. 그날 은혜는 나으려고 약을 먹었다가 귀를 붙잡고 숙소 바닥을 뒹굴었다.      


빈민가의 아이들이 한가득 와서 1달러만 달라고 외쳐대든, 워킹 스트릿의 비키니만 입은 여성들이나 바끌라들이 와서 들러붙든 오 년 전 어느 날 사기를 당한 그날부터 은혜에게는 그 어떤 것도 대수롭지 않았다. 

     

한국 영사관 직원들이 사기 피해자들을 두고 어른에게 대든다고 개소리를 해대고 겨우 치킨 두 박스에 억대의 사기꾼을 풀어줄 수 있는 공간에선 은혜도 총을 소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조차 지금의 은혜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이 뼈가 아프도록 우스운 상황에선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지만 노란 셔츠를 입은 새파랗게 젊은 남자에게 갑자기 집으로 초대받을 줄은 몰랐다.      


은혜가 내가 지금 떡칠 기분으로 보이냐고 소리치려는 찰나 데이빗이 먼저 말을 걸었다.      


「돕고 싶어요. 한국에서는 은혜를 입으면 그보다 더 크게 갚아야 한다면서요.」    

 

은혜는 도대체 뭔 소린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을 은혜가 언제 어떻게 도왔다는 건지, 또 뭘 어떻게 갚는다는 건지.      


이십 대의 생기가 넘치고 발랄했던 은혜였다면 종알종알 묻고 싶은 것을 두서없이 막 떠들어 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은혜는 다르다.      


은혜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될 때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크게 열되 입은 굳게 다물고. 이 황당한 상황 안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게 먼저다.     

「줄 것도 있는데 지금 여기서 말하긴 좀 그래요. 가보면…」

「가보면 안다는 말은 위험한데? 내가 그쪽 뭘 믿고.」      


은혜는 결국 선글라스를 벗었다. 신분과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쓰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데이빗은 이미 은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면 승부가 낫다.      


선글라스를 벗는 은혜를 보고 데이빗은 화색이 돌았다.      


「와-. 말할 줄 아네요? 그 오 년 사이에 말을 못 하게 된 줄 알았어요.」     


은혜는 대꾸하지 않았다.     


「안심하라고는 못 하겠네요. 나는 당신을 알지만, 당신은 나를 모를 거 같아서. 그치만 간절히 찾던 거, 내가 가지고 있다면요?」     


순간 은혜는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 같았다.      


내가 간절하게 찾던 게 뭐더라? 

정의? 빼앗긴 돈? 누군가에게 뭘 증명하고 싶었나?     

 

그 엿 같은 영사관 놈들에게, 빌어먹을 필리핀 경찰과 검사에게 거 보라고, 내가 그 새끼 사기꾼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나?      


글쎄. 그래 봐야 뭐가 달라진다고.      


그 사기꾼 새끼가 왜 그랬는지 묻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왜 그랬냐라. 

그건 최소한의 신뢰 정도는 할 수 있는 관계에서나 물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은혜는 놈을 망치고 싶었다.      


은혜는 자신에게 새삼 소스라쳤다. 하지만 차분히 다시 생각해 봐도 그것밖에 없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놈을 망쳐야만 속이 풀릴 거 같았다.      


그녀가 갑자기 전신이 굳고 허리가 무너지며 간과 심장에 타격이 왔던 것처럼, 방 모서리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쿵쿵 쪼아가며 밤을 이루지 못했던 불면의 밤들처럼, 그런 고통을 그놈에게도 선사하고 싶었다.     


은혜가 그렇게 보낸 시간이 오 년이라면 그놈은 이십오 년쯤, 아니 이백오십 년쯤 그렇게 지내기를 원했다. 그 고통만으로 여생을 채우며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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