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은 은혜는 우렁찬 박수 소리를 들었다.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신 은혜는 귀 뒤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치로 향과 맛같이 원초적인 것만큼 효과가 좋은 건 없다.
동료들은 퇴근하고 프렌드쉽 한인타운을 가거나 대표와 함께 위더스 카지노를 갔다. 은혜도 종종 따라가고는 했는데 ‘미드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에는 커피나 한잔하러 간다며 이 카페로 와서 일을 계속했다.
은혜가 속한 SP 필름은 홍콩과 필리핀에 지사가 있고 미국에 본사가 있다고 했다. 대표는 한국계 미국인이라 했는데 그때만 해도 의심하지 않았다.
은혜가 맡은 것은 미국에 론칭할 드라마 기획이었다.
대표가 권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 「워킹 데드」, 「왕좌의 게임」, 「하우스 오브 카드」 등 쟁쟁한 미드의 흥행 이유를 분석하고 한국 제작팀이 만들 수 있는 미드를 기획해야 했다.
목표는 미국 드라마 시장에서 먼저 성공시킨 후 한국으로 역수입해오는 것.
생각해 보면 실체가 없는 프로젝트였다. 제작팀의 규모, 회사의 영향력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꾸는 꿈이었다. 그럼에도 욕망은 허영을 가렸다.
당시 은혜가 쓴 이야기는 관에서 시작되었다.
길고 검은 막이 쳐진 관이 서 있다.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소극장같이.
막이 걷히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듯 갓난아이가 울어댄다.
막이 닫혔다 다시 걷히면 드라마 「Lost」의 나빈 앤드루스가 변기에 앉아 변을 보다 불쾌한 듯 막을 닫아 버린다.
다시 막이 열리면 흥분해서 흔들리는 남자의 나체 안쪽에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에밀리아 클라크의 붉은 얼굴이 보이고 이내 그녀는 화면을 노려보면서 막을 닫는다.
다시 막이 열리면 방금 사람을 찌른 듯한 영화 「차일드 44」의 조엘 킨나만이 검붉은 단도를 들고 있다. 보면 안 될 것을 본 듯 막이 급하게 닫히면 닫힌 막을 뚫고 단도가 튀어나온다. 단도를 타고 피가 뚝뚝 떨어진다.
작은 관에 갇힌 그들은 관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삶은 결국 관에서 태어나 관에서 끝나는 것이다.
제멋대로 로그 라인을 쓰고 기획 의도를 잡은 뒤, 데모 영상을 만들 콘티를 짰다. 마음껏 캐스팅하고 리허설했다. 머릿속에선 이미 필름의 릴이 돌아가고 있었다.
눈을 감은 은혜는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우렁찬 박수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기립박수를 보냈고 은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혜는 단상 위로 올라가 건네받은 금빛 에미상에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동양 소녀의 희한한 수상소감을 감격에 겨운 얼굴로 들었다.
「Tonight is beautiful night. The Local is the local!! (아름다운 밤이군요. 지역색이 뚜렷한 에미상은 결국 지역색을 알아보는군요!)」
다년간 미드를 분석해 온 은혜가 그 노력에 대한 치하를 받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은혜?」
은혜는 상념을 깨는 데이빗의 부름에 슬며시 눈을 떴다.
그곳은 에미상 시상식장이 아니었다. 눈앞에는 그녀에게 상을 건네준 조지 RR. 마틴이 아니라 낯선 남자 데이빗이 앉아 있었다. 같은 것은 오로지 그녀의 눈물뿐이었다.
기분 좋은 자극이 지나간 뒤로 은혜는 문득 화가 났다.
이 맛과 향을 몰라서 지난 오 년간 이곳을 멀리한 게 아니었다.
아는 맛은 무서우니까.
향수에 젖는 게 지금으로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알았기에 멀리했는데 이 새끼는 순진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알아보고 나를 들뜨게 했던 곳으로 데려왔다.
은혜는 무의식적으로 핸드백 안의 총을 움켜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은혜는 만약 총을 사용하게 되면 그 이후의 삶이 그 전과는 전혀 달라질 거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필요한 순간이 오면 사용하게 될 거라는 것도.
데이빗은 미묘하게 다채로운 은혜의 미간을 살피다 말고 문득 이렇게 물었다.
「우리 집에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