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대비에 구역질이 났다.
앙헬레스만 오면, 지긋지긋한 비스타 베르드의 원형 도로를 돌 때면, 은혜의 심장은 밀려오는 산소를 뇌가 다 받아내기 힘들 정도로 숨을 헐떡였다. 그 때문에 매번 급하게 주차할 뿐 어떻게 주차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제 근무지에선 주차장이 잘 보여서요. 매번 꽁꽁 싸매고 계시던데 그냥 제가 오래전에 알던 분이랑 분위기가 비슷한 거 같아서 유심히 봤어요.」
은혜는 아까보다 더 진지하게 이 새끼를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저번에 왔을 때랑 몰 분위기가 완전 다르죠?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오늘 같은 날은 밖으로 좀 나오셔도 괜찮을 거 같은데. 시원한 거 한잔하실래요?」
역시 발음은 어설퍼도 말투가 영락없는 한국말이다. ‘정말’보다 ‘완전’을 쓰는 것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은혜는 근방에 혹시 갱단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복을 입지 않은 걸로 봐서 그는 오늘 비번인 것 같았다. 가드 설 때 들고 다니는 장총도 없었다.
은혜는 이 어수룩한 남자가 성가셨다.
하지만 동시에 앙헬레스에 사는 한인치고 이 쇼핑몰을 이용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머리에 스쳤다. 어쩌면 이놈에게서 그놈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혜는 결국 차에서 내렸다. 핸드백을 단단히 쥐고서.
지난 오 년 동안 앙헬레스에 올 때마다 쇼핑몰 주차장을 뻔질나게 애용했어도 안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마음 편히 쇼핑하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찌는 듯한 바깥 날씨에 비해 이가 덜덜 떨리는 쇼핑몰로 에어컨 샤워를 하러 온 것도, 가방을 모조리 검열당하는 피노이들에게 콧방귀나 뀌며 우월한 김치 민족을 자랑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 호사는 그게 호사인지도 몰랐던 오 년 전에 끝났다.
싸이 노래가 울려 퍼지던 오락실에서 이제는 BTS의 노래가 나왔다.
구독경제와 유튜브 인플루언서가 대세로 자리 잡은 후 한국에선 사라져 간 화장품 로드샵 브랜드들이 이 쇼핑몰에선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그들은 촉촉하고 오래가며 하얗게 만들어 준다고 광고를 해댔다. 한국이 하얀 민족이었던가.
그녀는 화장품 광고를 보고 비웃음이 났다. 같은 황인 계열에서도 상대적으로 하얗다는 것이 우월성을 가지다니.
현란한 LED 전광판에서는 반짝이는 광고가 수없이 바뀌었다. 처음 이 쇼핑몰에 왔을 때 그녀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던 실내 회전목마도 여전했다.
쇼핑몰 건너편 비스타 베르트 리조트에는 수영장이 무려 여섯 개나 있다. 그리고 리조트에서 멀지 않은 곳엔 쓰레기 매립지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마을이 있다.
이 기묘한 대비에 은혜는 여전히 구역질이 났다.
사람이 없어 좀 한적할 뿐 오 년 전 그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성공한 피노이들만 이 쇼핑몰에서 일했다. 그들은 필리핀의 표준어 따갈로그를 정확하게 쓸 줄 알고 영어에 능통해야 했다. 한국어나 일본어까지 할 줄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쇼핑몰은 필리핀 자본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필리핀의 경제가 굴러가도록 하는 상당수의 제반 시설 역시 필리핀 것이 아니었다. 필리핀의 엘리트들은 자국의 돈을 뽑아가는 타국 기업에서 일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살 수 있었다. 한 집에 식구가 적어도 일곱, 많으면 열둘 정도 되는데 일자리가 있는 식구는 고작 한 둘이었다.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려면 비키니바에서 일하거나 필리핀에서 동전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가는 외국계 기업에서 일해야 했다.
남자의 이름은 데이빗이었다.
은혜는 그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만나 본 필리핀 남자의 이름은 존, 데이빗, 크리스였고 여자의 이름은 에밀리, 크리스틴 심지어 애플이었다. 나이대가 좀 더 있는 사람들 중에는 까를로스나 이자벨라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자주 접할 수 있는 80년대생 이후로는 모두 데이빗, 크리스, 크리스틴이었다.
데이빗이 이끄는 카페로 들어설 때 은혜는 이 묘한 불쾌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곳은 오 년 전, 그녀가 아직 자신을 PD라고 믿고 있을 때 좋아하던 카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