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동료들은 고작 그런 것들에 넘어갔다.
앙헬레스 경찰서에서 처음 만난 한국 영사관 직원들은 은혜와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말을 끊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허! 어린 친구들이 말이야, 아무리 사정이 그래도 그렇지, 어른한테!」
그들은 전후 사정을 더 구체적으로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표는 드라마, 영화 제작 현장에서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최저 생계비보다 못한 돈으로 연명하던 은혜와 동료들을 위로하고 비전을 제시하며 접근했다.
저녁이 있는 삶과 능력이 닿는 한의 국제적 성취, 잠을 자면서도 내 작품이 오스카에 갈 수 있다는 꿈, 밥을 먹으면서도 마블과 일할 수 있다는 기회.
은혜와 동료들은 고작 그런 것들에 넘어갔다.
은혜는 분명 서류 전형에 합격하고 면접을 보았다. 그리고 신입 교육은 모두 이곳에서 한다던 필리핀 지사로 발령받았다.
SP필름은 대표와의 독대가 잦았다. 독대는 주로 위로로 시작하여 하소연으로 끝났다. 회사가 위기라 꿈을 향한 비전공동체도 위기를 맞았다고. 대출을 권유하고 수억 원을 떼갔다.
그런 놈에게 고작 왜 그랬느냐고 몇 마디 물은 것이 장유유서를 거스른다?
은혜는 문득 서른다섯이 다 된 자신에게도 영사관 직원이 그렇게 어린 친구와 어른을 운운할지 궁금해졌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마흔에도, 마흔다섯에도, 쉰에도, 쉰다섯에도 계속 찾아가 같은 질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일 생각이었다.
정말 내가 내 인생을 시궁창에 던진 사람에게 왜 그랬냐고 물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느냐고.
4.
똑똑.
차창을 똑똑 두들기는 소리에 은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필리핀에서 그녀에게 아는 척할 사람은 없다. 정보원이든 거래처든 모두 텔레그램으로 소통했기에 직접적으로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마스크를 콧등 위까지 써서 코털 하나, 눈썹 터럭 하나 보이지 않는 그녀를 무슨 수로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하는 걸까. 은혜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가슴팍을 힘주어 노려보았다.
구걸을 나온 아이는 아니었다.
노란 반팔 티셔츠 안에는 벌어진 가슴이 숨어 있었고, 팔은 다부져 보였다. 드러난 팔의 피부색은 은퇴한 미군의 흰 바탕에 검은 반점이 그득한 팔보다 어두웠고 노르스름한 은혜의 팔보다도 더 어두웠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허리의 위치로 봐서는 필리핀 사람치고 키가 제법 컸다.
결정적으로 이놈은 어렸다. 차 유리창에 살짝 얹은 손은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였어도 겨우 스물 남짓할 것같이 앳되어 보였다.
은혜는 무릎 위에 놓인 핸드백에 손을 넣어 묵직한 것을 지그시 감싸 쥐었다. 차갑고 둔탁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이곳에서는 쉽게 가능했다.
불쑥 남자가 차창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차창을 노려보며 핸드백 안의 총을 꽈악 쥐고 있었던 은혜는 문득 눈이 마주치자 섬찟했다.
그저께 은혜에게 찡긋거리던 그 남자였다.
눈을 가리고 있으니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자신이 놀란 걸 저쪽에 들킬 뻔했다.
남자는 마치 안에 있는 거 다 안다는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미소를 흘리더니 선글라스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계속 빤히 쳐다봤다. 그는 급할 거 하나 없다는 듯 다시 천천히 차창을 두드렸다.
똑똑똑.
「또 오셨네요?」
발음이 약간 어눌했지만 분명한 한국말이었다.
차창을 내리자마자 남자는 은혜가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또 오셨네요.
은혜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언제부터 날 알아본 걸까.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하나. 본능적으로 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글라스가 움찔하고 움직이는 것을 본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제대로 알아본 게 맞나 봐요. 차가 늘 바뀌던데 늘 급하게 들어와서 오른쪽 휠을 안쪽으로 꺾어 세워두는 건 여전하시네요. 오늘도 경찰서만 뚫어지게 쳐다보다 가실 건가요?」
은혜는 아차 싶었다.
매번 다른 차를 빌리고 아무리 위장하고 돌아다녀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었던 건가.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습관은 지문보다 더 정확히 은혜를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