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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Dec 19. 2024

#37 「This Is Water」 3화

3차 확장이 일어난 것으로 보여 …


은혜를 떠나보내고 상담사는 모니터만 뚫어져라 노려볼 뿐 쉽게 보고서를 쓰지 못했다. 한참만에 생각을 정리한 임상심리상담사는 은혜에 대한 기록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 서구 정신건강센터 임상심리상담사의 내담자 정은혜 씨에 대한 다섯 번째 기록


정은혜 씨는 영일당 오진희 의원을 언급하며 분명 화를 내었다.

죽은 사람이 화를 낼 수 있을까?


그녀는 본 상담사를 만나기 전, 우울증과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장애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첫 상담이 있었던 9월 중순으로부터 약 6개월 전, 어떤 사고에 의해 불면이 시작되었고 한동안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눈물로 보냈다고 했다.      


실제로 자율신경계 검사에서 부교감신경 강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부교감 신경이 과도하게 항진되면서 저혈압, 수면 장애, 소화 불능, 무기력 등의 증상을 겪는 것으로 보였다.     


정은혜 씨는 점차 음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음주 후 겨우 잠들 수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악몽을 꾸었다. 악몽 속의 그녀는 약간의 변형은 있어도 매번 같은 장소,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고 한다. 그녀의 의식은 그런 자기 자신을 지켜만 볼 뿐, 마치 갇힌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꿈에서 얼마나 험한 일을 당한 건지 깨고 나면 광대와 턱에 푸른 멍이 들어 있거나 생채기가 나 있었고 목이나 어깨가 결렸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지난 5회의 면담에서 일치하지 않는 정보를 걸러내고 감정적 언어를 제외한 1차 우울 징후와 PTSD 침투 현상에 대한 정리이다.     


문제는 ‘어떤 사건’이었고, ‘어떤 꿈’이었는지 현재의 그녀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은혜 씨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부분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었다. 지나친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인해 그녀의 뇌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기억의 일부분을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은혜 씨는 이와 같은 상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트라우마를 일으킨 사건이 기억에서 없어지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사건의 기억과 함께 얽혀있던 긍정적인 기억마저 소실되자 그녀가 가졌던 좋았던 추억, 좋고 싫음과 관련된 취향, 욕구와 관련된 성취 등마저 흐릿해졌다고 했다.      


그녀는 매 방문 때마다 점점 더 불안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왔는지조차 잊어버린 것만 같다.      


마치 수조 안의 금붕어처럼 말이 뱅뱅 돈다. 그녀의 머릿속도 그와 같을 것이다.      


가끔은 설거지를 하다 말고 주저앉아, 한참을 무얼 하려 했었는지 되짚어 본다고도 했다. 당장 무얼 하려 했었는지가 아니라 분명 꿈이라던가 비전이라던가 하는 게 있었던 거 같은데 그걸 잃었다고, 그걸 찾지 못하니까 설거지도 안 되더라며. 설거지 좀 하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고 털어놓았다.      


나쁜 과거를 잊으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과거의 토대가 없어지자, 현재와 미래조차 없어진 것은 아닐까?     


하나의 정신질환은 다른 정신질환으로 전이가 되거나 다른 질환과 만나 시너지를 일으켜 문제가 심각해지기도 한다.      


오늘 면담 때 그녀가 보였던 태도는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코타르 증후군Cotard’s sydrome, 다른 말로 ‘걷는 시체 증후군’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한국에서는 드문 케이스인데 PTSD 장애, 해리성 장애 이후 코타르 증후군까지 벌써 3차 확장이 일어난 것으로 보여 약물치료가 시급해 보인다.


보호자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3.          



2020년 3월 18일. 은혜가 탄 낡은 포드는 앙헬레스에 있는 비스타 베르드 앞의 원형 도로를 한 바퀴 돌아 대형 쇼핑몰로 들어갔다.      


신호가 따로 없는 원형 도로는 중앙의 원형을 돌아 각기 제가 원하는 곳으로 나가야 했다. 은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이 원형 도로가 낯설고 차선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애를 먹었다. 차들이 머리를 먼저 들이밀고 틈을 주지 않아 계속해서 돌고 돌고 돌기만 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한산하기 그지없는 원형 도로에서 은혜는 여전히 긴장한 듯 운전대를 꽉 잡았다.     


은혜의 눈이 파리하게 떨렸다. 락다운Lockdown이 걸리기 직전, 앙헬레스에 도착한 은혜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오 년 동안 벌써 열여섯 번째 필리핀 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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