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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This Is Water」후기 ③

일원화된 삶이 살고 싶었다.

by 아노 Art Nomad

사진 : YoungIDEA2013Paris에서 만난 13개국 42명(나 포함)의 청년 배우들.


파리에 다녀올 즈음의 나는 배우로 살아가는 게 조금은 버거웠다.


앞으로도 배우로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당시에 서류를 포함해 떨어진 오디션만 이미 300번이 넘었다. 물론 그때부터 지금까지 잘 버티고 계신 배우들도 있다. 사연없는 배우 또한 드물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파리에 가보니 축제에 선정되어 참여한 13개국 중에 국가나 기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비로 온 팀은 한국 밖에 없었다. 좋은 일로 선정되어 갔는데 갔다왔더니 기회 박탈, 빚, 조롱만이 남았다.


모멸감으로 인해 어딘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누가 뭐하냐고 물으면 그냥 ‘논다’고 대답해 버렸다. 노력을 결실로 증명할 수가 없어서.


그 얼굴로, 제까짓 게.


연예인이라는 후광이 탐나 허영에 빠진 정신 나간 사람으로 비춰지는 게 싫었다. 기껏 무얼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동안에 머릿속에 ‘아. 뜬 작품이 없는 배우.’로 재단하고 있는 눈빛을 보는 것도 싫었다. 비단 완벽한 타인에게서만 이런 눈빛을 보는 게 아니었다. 부모님, 친인척들에게 마저 배우보다는 그저 노는 대학생, 또는 장기 취준생 등 차라리 한심한 사람이 되는 게 나을 지경이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명절이 지나고 배우들끼리 모이고 나면, ‘요새 뭐 하고 지내냐?’라는 질문에 다들 ‘놀아요.’하고 대답했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서로는 우리가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연기에 재능이 없다는 것도 슬슬 알아차렸다.


나는 너무 느렸다.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도,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도. 행동과 생각이 굼뜨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동시적으로 일어나야 할 리액션이 나오지 않았다.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 머리 속에는 ‘이랬어야 했는데, 저랬어야 했는데’하는 후회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 주제에 불려나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은 또 넙죽넙죽 받아먹고, 답답하다고 동료들과 따로 또 마시고 다음 날에도 여전히 연기 숙제를 풀지 못했다.


모든 것이 이중 노선이었다.


알바로 돈을 벌면서 나는 내 직업을 배우라 생각했다.


잠잘 시간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일하고, 오디션 보고, 무대에 섰지만 누가 뭐하냐고 물어보면 ‘논다.’고 대답했다.


말하는 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부모님의 뇌리 속에서 나는 점점 ‘인간 구실도 못 하는 새끼’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내게 들어간 교육비가 내 빚이 되었다.


연기 뿐 아니라 연기판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납득하지 못하면 대가리를 박지 못해서.

나는 우울했지만 우울한 티를 낼 수 없었다. 누가 우울한 신인 배우를 기용하겠나.


일원화된 삶을 살고 싶어졌다. 숨김이 없고, 기량을 펼칠 수 있는.


다행히 나는 깨어 있었다.

아무리 사랑해 마지않았던 연기라 해도 그 이상의 자기기만을 버틸 수가 없었다.


학교로 방향을 틀어보려 했다. 한예종 극작과에 지원했고 1차는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학교 시험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PD로 전향하려 노력했다. PD하면 보통 드라마나 예능에서 직접 촬영을 지휘하는 PD를 떠올릴 거 같다. 하지만 영화판에서 기획, 배급, 유통을 담당하는 사람도 PD라 부른다. 좋은 작품을 미리 선점해 수입하거나, 좋은 기획을 만들어 제작해 주실 감독님을 찾거나 하는 역할 등을 한다.


가까운 지인은 내게 ‘난 네가 창의적인 일을 계속 할 거라 생각했는데?’라고 했지만 그때의 심정으로는 ‘주어진 일을 성실히’하며 보편적 인생 안에 끼고 싶었다.


토익, 토플 점수, 영어스피킹, HSK, 한자 등급, 워드 자격증, 운전면허를 갖췄다.

80여 군데에 지원했고 이 중 1/3 정도는 서류를 통과했다. 한 시간가량의 면접도 봤다. 2, 3차까지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종에서 떨어졌다.


답답해서 어떤 이유로 떨어졌는지 정중하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대부분은 나이 때문이라고 했다. 나보다 일찍 취직해서 연차가 높은 어린 사수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싫다고 했다고. 그때 나는 아직 이십대였다.


딱 한 군데 최종 면접까지 합격한 회사가 있었다.

S. P. 필름이라는 외국계 영상제작사로, 배우 아카데미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 배우 경력을 높이 산다고.


소설을 읽고 오신 분들은 이렇게만 얘기해도 이게 뭔 말인지 알 듯 싶다. 그렇다. 은혜가 당한 그 회사가 바로 S. P. 필름이라고 하는 유령회사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연혁과 소개가 있는 홈페이지도 있었다. 사업자 등록증도 다 확인했고 한국에 파견했다던 직원과 면접도 보았다. 본사는 미국에 있고 지사가 홍콩과 필리핀에 있다고 했다. 기초 연수는 필리핀에서 해야 한다고 했고 능력치에 따라 본사나 홍콩지사 발령이 나온다고.


나는 홍콩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홍콩 배우, 배우 지망생들과 워크샵도 같이 했다. 나는 이들을 IDEA페스티발을 계기로 프랑스에서 다시 만났다. 홍콩 팀은 이미 전에 YoungIDEA에 선정이 된 적 있어 초청팀 자격으로 왔다. 초청팀은 프랑스, 홍콩, 태국, 방글라데시 합작이자 창작인 연극을 들고 왔다. 메콩강을 둘러싼 식민의 역사와 국가 갈등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팀과 마찬가지로 YoungIDEA2013에 뽑힌 열세 팀 중 필리핀 공연팀은 필리핀의 유일한 국립극장 전속 배우들이었고 그들의 만든 뮤지컬이 모든 공연을 통틀어 가장 좋았다. 필리핀 팀은 마닐라와 그 외 도시의 빈부격차와 그로인한 마약 범죄의 유혹에 대해 다루었다.


누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내가 만나 본 몇몇 홍콩 사람과 필리핀 사람이 좋았다고 S. P. 필름이 제시한 경력들이 신뢰성 있다고 생각했다니. 필리핀에서 나의 치안이 보장 될 거라 믿었다니.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 걸까.


필리핀 배우들이 너무 건실했고 그들과의 경험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나는 필리핀의 일부 지역이 극도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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