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뜻대로
흥 많은 나라 필리핀에서는 일 년 내내 축제가 벌어진다.
한 달 내내 연휴라고도 볼 수 있는 12월, 크리스마스와 신년맞이 축제는 무려 9월부터 준비하기 시작하며 그만큼 몰리는 인파도 많다.
다윗은 번영회에 크리스마스 축제에서 실종 아동 전단지를 돌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민수는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기숙의 손에 끌려왔다.
기숙은 민수뿐 아니라 민수가 부린 난동 때문에 서먹해진 번영회 사람들도 끌고 왔다. 그녀는 그들의 손에 전단지를 쥐여주고 힘주어 말했다.
「어차피 다들 연휴에 어디 갈 것도 아니고, 술 먹고 화투 치거나 카지노에 처박혀 있을 거 아냐? 그러느니 민수도 돕고 하면 좀 좋아?」
얼마 전까지 그만하자던 기숙이 태도를 바꾸었다. 기숙의 시선 끝에 그녀의 남편이 있었다. 밤새 길 건너 「고향댁」 뒷방에서 노름하다 아침에 들어온 그 역시 기숙에게 끌려 나와 있었다.
기숙은 동네 단속이 필요했고 민수는 전단지를 함께 돌릴 일손이 필요했다.
민수는 그런 일이 있고도 이렇게 앞장서주는 기숙이 고마웠다. 물론 표현은 하지 않았다.
「One for 250. How many, sir? (한 장에 250페소입니다. 몇 장 드릴까요?)」
「Six. (여섯 장.)」
축제 진행요원은 민수에게 1500페소를 받고 입장권팔찌 여섯 장을 건네주었다.
「Your free drink in this ticket. In&out is not available. (티켓을 보여주시면 무료 음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번 들어가시면 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수 없어요.)」
기숙이 굼뜬 민수의 손에서 입장권 팔찌를 낚아채 모두에게 돌렸다. 그때까지 입을 삐쭉거리며 시큰둥하게 있던 성철도 팔찌를 받아 들었다.
행사장 안, 중앙 무대로 가는 길은 먹거리 부스, 코스튬 부스, 맥주 부스 등이 즐비했다. 사람들은 멀리 들리는 디제잉 소리에 맞춰 가면서부터 이미 춤을 추었고 셀카를 찍었다. 곳곳의 감시 타워에서는 레밍턴을 든 경찰이 무료한 듯 하품했고, 마약 탐지견을 동반한 경찰이 길 한복판을 오갔다.
「Looking carefully. This is my daughter. (잘 좀 봐주십쇼. 제 딸애입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비집고 민수가 간절하게 말했다. 필젠이나 산미구엘 맥주를 든 사람들은 신이 널 도울 거라며 바할라나Bahala Na하고 그저 지나가 버렸다.
그때, 민수의 시선을 끄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노란 머리의 그들은 점차 민수에게 다가왔다. 민수는 땅에 박힌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어이, 장 사장! 이거 좀 봐!」
성철의 손에는 어느새 산미구엘이 들려 있었다. 성철은 노란 머리 무리와 함께 민수에게 다가갔다. 그는 머리에 파인애플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파인애플 탈에는 무수한 눈이 희번덕거리고 갓 묻은 것 같은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성철의 옆으로 탈을 벗어준 청년이 웃었다. 청년의 친구들은 마체테Machete를 들고 바나나 살인마, 망고 살인마를 흉내 내고 있었다. 손수 만든 탈은 어설퍼, 애들 장난감 같았다.
「어때. 파인애플 살인마 같냐?」
민수는 성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성철의 누런 생니가 날아가도록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번영회 사람들이 몰려와 말리는 소리도 민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죽어. 죽어, 이 개새끼야!」
민수의 주먹은 어느덧 코스튬 탈에 묻어 있던 진득한 피와 성철의 피로 범벅이었다. 전단지는 여기저기 흩어져 수지의 얼굴이 사람들의 발에 밟혔다.
주먹질을 겨우 멈춘 민수는 씩씩거렸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성철을 더 쳤다간 그마저 살인자가 될 지경이었다.
경찰 둘이 다가왔다. 민수는 경찰을 올려다봤다. 경찰 중 하나가 민수의 텅 빈 얼굴을 알아보았다. 민수에게 졸리비Jollibee 치킨 꽤나 얻어먹은 경찰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행사장 밖으로 향하는 그를 막지 않았다.
사람들은 민수의 뒤통수에 대고 웅성거렸다.
「괜찮으세요?」
「뭐야, 축제에 와선.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9.
민수는 총기를 싫어했다.
집총 거부로 실형을 살 건지, 눈 딱 감고 2년 버틸 건지 저울질하다 때를 놓쳐 입대했다. 처음 잡은 K2의 그립감이 생각보다 좋아 사격이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사격 만발로 포상 휴가를 받았을 때도 훈련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의 찝찝함은 지우지 못했다.
민수는 한국의 총기 정책을 지지했다. 테이저건으로 제압하고 긴박한 순간엔 38 구경 리볼버 정도로 대응하는 경찰을 신뢰했다.
‘총기가 범죄를 낳는다.’
민수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그랬다.
필리핀의 쇼핑몰마다 배치된 시큐리티 가드들이 36인치에 달하는 개조한 레밍턴을 들고 있는 걸 처음 보았을 때, 민수는 경악했다. 가드의 인상이 총을 그리 잘 쏠 거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그 총이 조준용이 아니라 난사용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낯선 나라에 왔다는 것이 처음 실감 났다. 이제 그마저도 익숙해져 버려 별다른 인상이 남아 있지 않아도 총기는 최선의 방어가 아니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바로 어제까지는 그랬다.
민수는 지금 등록되지 않은 M16, 콜트 45 구경을 밀거래하려는 중이다.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아내, 안젤라는 연락이 끊긴 지 48시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