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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Dec 04. 2017

조금 느린 어른들

배우리 작가가 그리는 표정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제법 잘 성장한 어른이다. 나의 미숙한 모습을 굳이 드러내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도 나는 꽤 균형이 잡힌 현대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울은 단지 세계를 비추는 환영의 한 조각이라는 사실을 깊히 깨닫기는 힘들다. 나에 대한 왠지모를 불편감은 조금은 어색한 그림을 마주할때, 혹은 꿈을 꿀때, 나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어떠한 환경과 만날때, 좀 더 큰 그림 속 나를 찾기 위해 문득문득 되살아난다.  


현실세계라는 거울은 우리에게 환경에 잘 적응한 우리를 작은 렌즈로 비추어 준다. 그것이 내가 아는 스스로의 표정이다. 관계를 제대로 맺거나 바라볼 때 진정 필요로 하는 '표정'은 사실상 우리에게 유일하게 진화하지 않고, 어떠한 미숙한 심리적인 기제가 되어 간다. 문화예술 행사들도 때로는 그럴싸한 품위유지의 차원과 속도감에 매몰되어 진정한 표정으로 역할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얼굴에는 월등하게 성장하여 두각을 나타내는 속도의 그림자가 아닌 - 나 자신의 어떠한 순간 - 혹은 내가 바라보는 대상에 새겨지는 상상력의 거울로서의 표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우리의 또 다른 차원의 느린 시간, 내면의 속삭임을 ‘조금 느린 어른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배우리 작가는 꾸준하게 어린아이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캔버스에 가득 차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은 단순하고 과감한 배치와 함께 세부적인 묘사보다는 일종의 심리적인 표상으로 사람의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특별히 형태적인 긴장이나 색채의 대조와 파격이 드러나지는 않은 그림은 우리 스스로의 심상을 유추하며 시간을 들여 그림을 마주하게 한다. 배우리의 그림은 평평한 색감과 화면 구성 위에 오롯이 표정 만을 대상으로 약간은 독특하게 순발력 있는 변주를 가미한다. 아이의 얼굴은 단순히 순화된 어떠한 종류의 미적 생생함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담백하고 순진한 표정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한결 누그러지는 마음과 아득하고 나이브했던 어느 한 시기를 떠올리며 안심하게 된다.





 


배우리의 그림에 나타나는 아이들의 표정은 어딘지 묘하게 깊은 눈동자의 순진무구함과 울고 난 뒤의 콧물 자국, 약간은 두리번거리며 의존할 곳을 찾는 연약한 사람의 불안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표정들은 한없이 깊은 우주를 담아낼 수도 있는 인간적인 가능성까지 담고 있는 표정들이다. 그렇게 느리게 성장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들은 작가 스스로의 불편함에 대한 위로일 수도, 타인을 감싸 안고 우리에게 보내는 시선의 위로일 수도 있다. 담백하게 처리된 얼굴의 단순한 여백과 대조되는 섬세한 눈동자는 인간적 끌림의 깊은 세계를 담아내는 것 같기도 하다.


배우리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아이들의 얼굴은 전시를 거치며 작가의 내면과 함께 아주 천천히 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걸치는 문화라는 외투도 (요즈음 사람들은 스타일이라는 말을 즐겨쓴다.) 어쩌면 이처럼 우리 내면의 시계처럼 서서히 나와의 관련을 맺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결국 관계나 내면화되지 않은 바라보기는 그저 또 하나의 가면일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배우리 작가의 표정들이 그려내는 재기와 발랄함이 지닌 독특한 시선의 끌림이 매력적일수록 또한 그 천진한 매력이 지닌 몰개성적인 세대성이 다소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리가 택한 회화라는 독자적인 표현방식의 매체란, 결국 다양한 형태와의 긴장을 통한 정신적 흔적을 제대로 짚어보지 않으면 얻기 힘든 평가적 의미로 비로소 독창적 가치를 담보하게 되는 양식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배우리의 그림에서 엿보이는 표현의 섬세함이나 진중한 단순성이 보여주는 여백이 그러한 위험성을 상당 부분 보완하고 있다. 


매력적이지만 어딘가 천진하기만 한 표정을 담은 그림 속 아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배우리의 회화 역시 끌림과 내면의 시간을 담아내는 표정이 있는 그림으로 함께 성장해 갔으면 하는 기대가 생김을 깨닫는다. 그림-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거울 속, 아이의 눈동자와 눈을 맞춘 나는 이미 그 대상과는 '아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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