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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n Money in New York Feb 01. 2024

[100 챌린지] 단지의 독서노트_40

인연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저자 채사장

출판 웨일북

발행 2017.12.31.

지평은 나의 범위인 동시에 세계의 범위다. 우리는 각자의 지평에서 산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놀라운 사건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깝다. 너를 안는다는 것은 나의 둥근 원 안으로 너의 원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며, 너의 세계의 파도가 내 세계의 해안을 잠식하는 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 거다. 폭풍 같은 시간을 함께하고 결국은 다시 혼자가 된 사람의 눈동자가 더 깊어진 까닭은. 이제 그의 세계는 휩쓸고 지나간 다른 세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더 풍요로워지며,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워진다. 헤어짐이 반드시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패도, 낭비도 아니다. 시간이 흘러 마음의 파도가 가라앉았을 때, 내 세계의 해안을 따라 한번 걸어보라. 그곳에는 그의 세계가 남겨놓은 시간과 이야기와 성숙과 이해가 조개껍질이 되어 모래사장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을 테니.

시간에 대하여.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사람은 자기만의 시간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현재에 살지만 다른 이는 과거에 살고, 또 다른 이는 미래에 산다. 나는 과거에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두 종류다. 어떤 사람들은 후회 속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그리움 속을 살아간다. 그의 과거는 강력하게 현재와 미래를 잠식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 전체는 하나의 과거가 된다. 나는 미래에 사는 사람들도 만난다. 그들 역시 두 종류다. 어떤 사람들은 희망 속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불안 속을 살아간다. 그의 미래는 강력하게 그의 현재와 과거를 잠식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 전체는 하나의 미래가 된다. 타인이 어느 정도의 시간의 범위에서 살아가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내면의 시간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가까운 미래를 살고, 다른 이는 가까운 과거를 살며, 또 다른 이들은 먼 미래나 먼 과거에 산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독특한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 극단적으로 먼 미래나 먼 과거를 살아가는 사람들. 죽음 이후나 탄생 이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재不在’를 살아간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음, 사라짐, 무無, 이곳이 아님, 피안彼岸, 초월을 현재로 당겨와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삶이 가능할 리 없다. 부재가 삶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차라리 삶을 지워낸다. 극단적인 미래를 사는 사람들에게 삶은 없다.

이런 사람들.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평가하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한 사람들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어떤 사람들은 타당한 근거로 이들을 긍정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부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멸을 인지하기 때문에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이들은 철학적인 사람이 되거나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타당한 근거로 이들을 부정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부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멸에 집중하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고 종교나 사후세계, 형이상학적인 무언가에 집착한다. 이들은 허황된 것들을 좇다가 정작 중요한 현실을 망가뜨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떤 타당한 이유를 대고 반대편의 입장을 비판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러한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삶이고, 타인의 내면에서 평가될 일이다.

내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분명히 알아서다. 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미래의 죽음을 끌어와 현재를 살아간다. 현재의 삶에서 나를 가장 강력하게 잠식하고 있는 질문들은 이런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남는가?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는 과학의 주장은 합리적인가? 죽음 이후의 문제는 알 수 없다며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괜찮은 태도인가? 혹은 죽음 이후에 신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 태도는 문제가 없는가?

그리고 생각한다. 그 어떤 질문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음을.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한다. ‘부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삶’과 ‘존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같을 수는 없음을. 부재에 대한 사유는 현재의 나를 무기력하게 잠식하는 동시에,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갈구하게 하는 유일한 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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