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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n Money in New York Feb 10. 2024

[100 챌린지] 단지의 독서노트_59

국제정세

중동전쟁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저자 임용한, 조현영

출판 레드리버

발행 2022.11.30

유대인들은 격분했다. 토지를 소유할 수도 없고, 인구 규모도 3분의 1로 제한한다면 팔레스타인에서도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아랑곳 않고 팔레스타인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유대인 운반선을 나포해 키프로스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세기말 팔레스타인에 처음 시오니스트들이 나타났을 때, 순박한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손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지역 중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고립된 곳이었다. 그들도 고대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에 나라를 잃었다. 오스만제국 치하에 살고 있으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도 약했다.

20세기 초반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둘러싸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몰랐다. 이를테면 1차 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크스-피코협정을 맺어서 팔레스타인을 오스만제국에서 떼어내 분할하기로 한 일, 1917년 영국이 밸푸어선언을 발표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우기로 결정한 일 등을 듣지 못했다.

팔레스타인과 AHC도 가만있지 않았다. 양측 모두 조직을 갖추었으니 서로를 향한 테러와 정착촌 습격이 점점 늘었다. 카페에서 총을 난사하고, 시장에서 폭발물이 터지고, 달리는 버스에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팔레스타인의 주요 도시는 아랍인 거주 지역과 유대인 지구가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테러리스트들이 서로의 지역에 잠입해 공격했다. 영국인과 관공서도 표적이었다.

테러 전쟁에서도 유대인들이 우위를 보였다. 팔레스타인은 정치든 군사든 끝내 통일된 조직을 만들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조직된 최대 군사 단체는 1945년에 무함마드 알하라위가 창설한 ‘알나자다’였다. ‘알나자다’는 이스라엘의 하가 나와 비슷한 조직으로, 전성기에는 20여 개 지부에 8,0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렸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 혹은 훈련이란 퍼레이드나 아마추어 정찰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유대인은 전 세계에 뿌려놓은 디아스포라 덕분에 전문가도 많았고, 후원 조직도 막강했다. 영국군으로 복무하면서 부대에서 무기를 몰래 빼돌리거나, 외국에서 자금과 무기를 조직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상이 급변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을 지배하던 ‘세 마리의 사자(영국 왕실의 상징)’는 급격히 노쇠했다. 발톱 빠진 사자는 더 이상 식민지를 움켜쥐고 있을 힘이 없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영국의 철수가 기정사실이 되었고,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운다’는 시오니스트의 꿈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1.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은 각각 독립국가를 세운다.

2. 예루살렘은 중립지대로 하고 유엔이 통치, 감독한다.

11월 29일 총회에서 분리 독립안에 대한 찬반 투표가 진행됐다. 양쪽 모두에 독립국가의 꿈을 제공하는 바람에 눈치를 봐야 하는 영국은 기권했다. 아랍 국가들은 합심해서 반대표를 던졌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유럽 국가 대부분과 미국, 심지어 소련까지 유엔의 분할 독립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유엔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인정했다. 따지고 보면 팔레스타인도 수천 년 만에 나라를 되찾는 격이니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엔이 정한 팔레스타인 국경선이 있다.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기 위해 단결했다.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의 정상들은 팔레스타인 단독 국가 수립을 위해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을 합의했다. 오스만 군 장교 출신인 파우지 알까우 끄지 Fawzi al-Qawuqji가 조직한 군사 단체 ALA(아랍자유군, Arab Liberation Army)가 탄생했다. 병사는 아랍인 지원자로 채웠다. 의외로 이라크 장교와 병사가 많이 가담했고, 이들의 활약이 컸다. 전성기에 ALA의 병력은 약 6,000명이었다.

팔레스타인 전사를 훈련시키기 위한 캠프도 개설됐다. 2차 대전 중에 알후세이니와 히틀러가 뜻을 같이하면서 급조된 팔레스타인 훈련 캠프에 독일군 출신들이 투입됐다. 이집트에서 영국의 포로가 되었던 독일 장교나 병사가 개인적으로, 또는 이집트의 도움으로 수용소에서 탈출해 캠프에 합류하기도 했다. 독일군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는 팔레스타인인도 있었다. 이집트군 장교들도 특별 장기 휴가를 받아 캠프에 합류했다.

결국 1947년 5월, 유대인 국가의 수립이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약 1년 후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훗날 ‘중동전쟁’이라 명명된 전쟁이 발발했다. 공식적인 개전 일자는 1948년 5월 15일. 그러나 전쟁은 그전부터 이미 시작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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