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TRAVEL Dec 13. 2017

RAIL ROAD 5

ARTRAVEL VOL.24

RAIL ROAD 5 

아트래블 편집부



가지런히 놓여있는 철길만큼 여행자에게 평온을 가져다 주는 것이 또 있을까? 일단 기차가 선로에 오르면 길을 잃을 일이 없다.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한 방향으로 뻗어 나있는 길. 다만, 자신이 뻗어 있는 방향이 어디인가에 따라 철길의 운명은 극과 극이 된다. 때로는 마법 학교로 기차를 안내하기도 하고, 시인의 세상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가끔은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 여행자를 데려다 놓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다섯 방향으로 뻗은 철길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더 웨스트 하이랜드 라인

THE WEST HIGHLAND LINEㅣSCOTLAND



스코틀랜드 글래스코역. 마법 같은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글래스코역에서 포트윌리엄스까지 이어진 철도 구간 사이에는 산과 계곡, 호수들이 늘어서 있다. 창밖에 걸린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모두 깨끗해지는 기분이 든다. 만약 마법을 부릴 줄 알았더라면 이 고요한 경치를 모두 집 앞으로 옮겨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런 풍경이 있다면 고단한 일들은 모두 금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기찻길을 달리며 마법타령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이 구간이 영화 「해리포터」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호그와트로 향하는 마법 학교 생도들이 증기기관차를 타고 지나간 자리가 바로 더 웨스트 하이랜드 라인이다. 특히 포트윌리엄에서 출발해 말레이그에서 도착하는 구간에는 실제 증기기관차가 운행되고 있다. 더 재커바이트(The jacobite)사에서 운행하는 관광열차.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선로를 내달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마법학교 기차다. 모양도 똑같고, 구간도 똑같은 기찻길.


물론 우리에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자꾸 특별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구간.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행복은 존재하는 법이란다.
불을 켜는 일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지.
영화 「해리포터」 중에서



DISTANCE 329km

RESERVATION www.scotlandrailways.com

DEPARTURE GLASGOW

ARRIVAL FORT WILLIAM


미스즈시오사이

MISUZUSHIOSAㅣJAPAN



일본 야마구치현 작고 낡은 기차. 하루 단 두 번 왕복 운행하는 기차는 고작 두 량이 전부다. 기차는 선로를 따라 신시모노세키역에서 출발해 센자키역에서 멈춰 선다. 구간 내내 야마구치현의 복잡한 동쪽 해안선을 따라 달리던 기차가 잠시 멈추는 역마다 일본어로 된 시가 적혀있다. 미스즈시오사이 열차 구간은 시모노세키에서 활동했던 일본의 시인 가네코 미스즈를 기억하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가네코 미스즈는 1900년대 초반 일본의 동시 작가. 한국의 시인 윤동주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시인이기도 하다. 미스즈의 시선은 언제나 세상의 가장 작고 당연한 것들을 향해있었다. 매일 아침 노래하는 작은 새나 길가에 핀 민들레는 시인에게 좋은 영감이 됐다. 그만큼 작고 사소한 것들을 사랑했던 시인.


그런 시인에게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세상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결국, 우울증에 시달리던 미스즈는 27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살아있는 동안 남겨두었던 시들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생명을 얻게 된다. 지금은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사람. 넓은 세상을 생각하면서도 들꽃 한 송이를 사랑할 줄 알았던 시인 미스즈.


미스즈시오사이 구간을 달리는 동안 미스즈의 시구를 하나하나 곱씹어 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된다.



꽃이 지고 시들어 버린 민들레는
돌 틈새에 잠자코
봄이 올 때까지 숨어 있다
튼튼한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있는 거야
보이지 않는 것도 있는 거야.

가네코 미스즈 <별과 민들레> 중에서


DISTANCE 79.9km

RESERVATION 1,840엔(신시모노세키-센자키)

DEPARTURE SHIMONOSEKI

ARRIVAL SENZAKI


트란즈알파인

TRANZALPINE ㅣNEW ZEALAND



뉴질랜드 남섬 내륙 철도 구간 트란즈알파인. 이 구간은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시작해 그레이마우스에서 끝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의 기찻길을 뽑을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곳. 그만큼 창 밖 풍경이 멋지다. 이전에는 고속철도만 다니던 구간이었으나 1987년 철도회사 트란즈알파인이 여행객을 위해 개조한 기차로 구간을 달리기 시작하면서 유명해졌다. 개조한 기차의 넓은 창문을 열 수 있어 자연을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아기자기한 크라이스트처치의 작은 마을들을 지나 와이마키리리 강 계곡에 닿는다. 웅장한 와이마키리리 강 계곡 사이를 빠져나오면 양들이 뛰어노는 캔터베리 평원이 펼쳐진다. 세상에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모두 여기에 놓여있는 듯하다.


아직 끝이 아니다. 구간의 정점은 서던 알프스. 산맥의 모양이 유럽의 알스프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도 서던 알프스다. 만년설로 머리만 하얗게 물든 산들이 서있다. 입 벌리고 감탄하다 어느새 종착역이다. 4시간 30분 가량 걸리는 편도 시간이 사무치게 아쉬운 구간.



DISTANCE 223km

RESERVATION www.tranzscenic.com

DEPARTURE CRISTCHURCH

ARRIVAL GREYMOUTH


마하라야스 고속철도

MAHARAJAS ㅣ INDIA



인도 델리에서 뭄바이까지 약 1,400km를 달리는 구간. 편도로 12시간에서 24시간까지 소요된다. 다른 열차가 아니다. 같은 열차인데도 도착시간이 무려 12시간이나 차이가 난다. 게다가 기차 출발 시간도 천차만별. 두 세시간 연착은 기본이다. 불안한 마음에 기차 출발시간에 맞춰 플랫폼에 나가 봐도 감감 무소식인 경우가 허다하다. 태어나 이렇게 애타게 무엇인가를 기다려본 기억이 또 있을까 싶을 때쯤 기차가 도착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인도의 시간 개념, 클래스가 다르다.


델리-뭄바이 구간 마하라야스 고속철도에 오를 때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계획이나 편리함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떠올리는 순간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다. 이 기찻길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유희는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다. 그나마 영어는 초등학교 때부터 조각조각 엿들어온 것이 있지 않은가.


아는 모든 단어를 총동원해 대화를 시작해보면 어느 순간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인도사람과도 대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표정, 손짓, 모두가 알만한 영어단어 하나 툭툭 내뱉으면서 완성되는 대화. 델리-뭄바이 구간 기찻길 위에서는 매일 새로운 언어가 태어난다. 이름하여 마하라야스어. 자신의 언어마저 내려놓고 나면 스르르 잠이 온다. 최후에는 정신까지 내려놓고 자게 되는 델리-뭄바이 구간이다.



DISTANCE 1,400km

RESERVATION www.indianrail.gov.in

DEPARTURE DELHI

ARRIVAL MUMBAI


오쉬비엥침

OSWIECIM ㅣ POLAND


  


기차가 달리지 않아서 다행인 철길이 있다. 폴란드 남서부 도시 오쉬비엥침으로 향하는 선로. 과거 그곳으로 향하는 기차에서는 어떤 설렘도, 낭만도 느낄 수 없었다. 객차 안에는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들의 눈동자만이 빼곡히 빛났다. 한 칸에 백명도 넘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제대로 앉지도 못한 사람들은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적어도 답답한 기차보단 나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 그것은 기차 안에 사람들을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드디어 기차가 역에 도착했다. 지긋지긋한 선로를 벗어난 사람들은 이내 다시 선로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기차가 도착 한 곳은 오쉬비엥침. 독일어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처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선로를 만날 수 있다. 철조망 너머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철길은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린 듯 잔뜩 녹이 슬어 있다. 수용소 안에 들어가면 직접 선로를 밟아 볼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이 내렸을 플랫폼을 따라 걸어보기도 한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철길 위에서 말없이 눈물을 떨구는 사람들.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가두기 위해 놓여진 선로. 쇳덩어리는 죄가 없다. 다만, 그것을 만들어 놓은 사람의 죄로, 늙은 철길은 오랜 시간 이곳에서 많은 일들을 지켜봐야만 했을 뿐이다.


인간의 역사와 세계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던 차. 가만, 생명력 하나 없는 철길 사이로 들꽃이 피어나 있다. 가혹한 선로 위에도 꽃은 핀다. 가장 잔혹한 선로 위에서 희망을 본다. 앞으로 이런 일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는 중이라고. 그것은 참혹한 역사의 현장에서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 된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거지?

몰라, 그냥 저들이 시키는 대로 하자고

혹시 잘못 되진 않겠지?

에이, 설마 20세긴데, 지금이 18세기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별일 없을 거야

엘리 위젤 「나이트」 중에서



ADDRESS Wiezniow Oswiecimia 20, Oswiecim 32-600, Poland

WEB auschwitz.org



글│아트래블 편집부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www.artravel.co.kr
매거진의 이전글 ARTRAVEL VOL.2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