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다
도쿄행 버스를 타기 위해 걷고 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든다. 마치 내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1
도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쩝. 순간 짜증이 났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돌아섰다. 시작 지점까지 가는데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나는 오사카를 뒤로하고 도쿄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한 것이 다행이었다. 버스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하는 방법도 모를뿐더러 어찌해야 할지, 나이 많은 국제 미아가 될 수 도 있었다. 없는 살림에 일본 여행 한번 해보겠다고 결심한 뒤 경비를 아끼기 위해 저가형 버스를 선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버스 회사로부터 자세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일본어로 된 주소 하나 받아왔을 뿐이다)
오랜 시간 끝에 결국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 동네를 7바퀴 정도 방황한 후였다. 마지막에는 길가는 아저씨를 붙잡아 (너무 무섭다는 듯) 도움을 요청했다. 그 아저씨는 버스회사에 전화해 자세히 물어본 후 정류장까지 데려다줬다. 게. 다. 가. 아저씨는 나와 같은 버스 타는 사람 한 명을 찾아 나를 좀 부탁한다며(ㅎㅎ)... 일본인들의 친절함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도쿄행 버스를 탔다. 시간은 오후 9시쯤 이었던가. 다음날 새벽 5시에 도쿄에 나를 내려줄 것이다. 앞이 좁은 일반 좌석에 의자도 꼿꼿이 세운 채로 나는 떨리는 밤을 맞이했다. 긴 시간 후 나는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2
도쿄에서의 첫 식사는 맥도널드
새벽이라 사람도 얼마 없고, 도쿄 메트로의 표시만이 눈에 띄었다. 다행이다! 도쿄야 도쿄!!! 아직 도쿄에 온 것이 믿기지 않았다. 메트로의 계단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없다. 무거운 캐리어를 한 손으로 들고 낑낑대며 내려갔다. 도착한 첫날은 역시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신주쿠에서는 아파트 민박에 묵었는데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어딘가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신오쿠보역에 내린 나는 앞에 보이는 맥도널드에 들어갔다.
빅맥 세트를 시켜놓고 창밖을 구경하고, 일기도 좀 쓰다 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났다. 사정을 설명해 조금 빨리 들어간 아파트는 생각보다 좋았다. 주인아주머니는 옆방에 커플이 있는데 피해 주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당시 순수했던 나로서는 결혼 안 한 커플이 여행을 왔다는 것이 충격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거실에 있는 컴퓨터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SNS에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일본 남자였다. 순간 '일본 사람이 민박집에는 무슨 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한 내가 “응?”이라고 한국말로 말하자 미안하다면서 옆집 사는데 잘못 들어왔다고 했다. 그 남자가 나간 뒤 나는 얼른 현관문을 잠갔다.
#3
이쁜 남자들이 우르르 “여긴 어디?”
도쿄의 아파트에서 만난 옆방 커플과 나는 맥주 한잔 하며 친해졌다. 언니는 사람들이 두고 갔다며 도쿄 지도 꾸러미를 내게 건넸다. 안 그래도 제대로 된 지도가 없었던 나는 얼른 가방에 넣었다. 길도 익힐 겸 숙소를 나서려 하자 언니는 신주쿠 역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줬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100엔 샵, 돈키호테(면세점인 줄 알고 근처에도 안 갔는데 그냥 마트였다), 한국어로 도배된 스타샵도 보였다. 이병헌, 배용준 같은 배우들 사진이 사방에 깔려있으니, 한류 열풍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사카에서 만난 원데이 여행친구 언니가 말했던 요시노야 식당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어떤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내 눈앞에는 태어나서 본 적 없는 미소년들이 떼를 지어 있었다. 후에 들어보니 그곳은 호스트바였단다.
#4
무인 지하철 '유리카모메' 타고 오다이바 둘러보기
동경 메트로 일일 승차권을 사면 하루 종일 미술관을 돌아볼 수 있다. 그. 러. 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여행의 묘미. 이렇게 저렇게 계획이 꼬여 결국 무인 지하철 유리카모메를 타고 오다이바에 가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기사 없이 지하철이 움직이다니 충격의 도가니탕이었다. 티켓을 사러 갔더니 배 탭승권이 포함된 티켓은 다른 곳에서 판매한다고 했다. 귀찮은 마음에 지하철만 탈 수 있는 유리카모메 패스를 구입했다. 출발 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맨 앞칸에 타면 경치가 그렇게 좋다고 강추하는 글들이 많았다. 유리카모메 맨 앞 칸에 타기 위해 몇 대를 그냥 보내고 드디어 창문 앞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구경하고 사진 찍으며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본격적인 여행은 종착역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후에야 시작됐다. 먼저 도쿄 빅 사이트에 들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무런 전시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아쿠아시티, 자유의 여신상을 거쳐 후지티비로 갔다. 후지티비에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는지 송승헌의 인기가 장난 아니었다. 광장에서는 사진 전시회도 열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전시를 본 뒤 팔레트 타운, 비너스포트 쇼핑몰을 둘러봤다. Wow! 비너스포트는 듣던 대로 규모가 엄청났다. 유럽풍의 인테리어도 멋지고 색상별 골목으로 이루어져 신선했다. (한참 후에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쇼핑몰을 만들었더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비도 오고 다리도 아팠다. 그렇다고 숙소로 돌아가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어 텔레콤 센터에 있는 전망대에 들러 돌아가기로 했다. 텔레콤센터의 22층은 전망대로 쓰인다. 한쪽은 전망대 한쪽은 레스토랑이었다. 이 날 밤은 참 멋졌다. 망원경으로 보는 도쿄를 둘러보며 어느새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5
갈 곳이 너무 많다
오사카와 달리 도쿄에서는 둘러볼 곳들이 정말 많았다. 최대 규모의 선샤인 아쿠아리움과 모리미술관, 달리 미술관, 지브리 박물관, 천체 박물관(?), 도쿄타워 등. 땅이 넓은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하나에 전문성이 묻어나는 포인트가 많았다. 예술 전공자로서 미술관들을 먼저 섭렵한 후 아쿠아리움, 영화관, 천체관을 둘러봤는데 그 시간만 며칠이 걸렸다.
#6
낯선 남자와 마지막 저녁을
신주쿠 역 앞에서 작은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잠시 노래나 들을 겸 서서 구경했다. 네 명의 남자가수였는데 노래를 제법 잘했다. 그리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숙소를 찾으려 한참 걷는데 한 남자가 내 팔을 붙잡는다. 일본어를 못한다고 했더니 영어로 묻는다. 어디 가냐고. 나는 숙소로 가고 있는데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했다. 그 남자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또 한국을 좋아한다며 몇 번 가본 적 있다고 했다. 한국 얘기로 급 친해진 우리는 다시 신주쿠 역 근처로 돌아가 간단하게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다.
그 남자는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닌다고 자신을 소개했고 나는 학생이라고 했다. 어차피 나는 여행객이라 서로 더 이상의 정보는 필요치 않았다. 그 남자는 한 식당을 소개하며 사시미와 야끼도리가 맛있다고 했다. 그날 음식점의 분위기와 맛을 생각해보면 현지인들만 알고 가는 곳으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진정한 일본의 맛을 봤다고 해야 할까. 식사를 마친 우리는 이메일을 주고받은 뒤 헤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철없이 아무것도 모를 때였기에 가능했던 저녁이 아니었을까.
#7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다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는 '지브리 박물관'이었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은 아니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애니메이션을 좋아라 한다. 박물관에 대해 글로 쓸 것은 별로 없지만, 그곳에서 받은 티켓은 너무 신선해서 지금까지도 내 보물상자에 간직하고 있다. 실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 담긴 필름 형태의 티켓이다. 받아 본 사람은 누구나 그 감동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여행에서의 1분 1초는 일상에서보다 훨씬 빠르다. 어느새 보름간의 여행이 끝났다. 혼자 떠난 첫 여행은 서툴렀지만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 여행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은 아마도 다시 볼 수 없겠지만 내 추억 속에 영원하겠지. 열여덟의 일본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