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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진 May 01. 2020

자화상 왜 그렸을까?

2013년에 유행했던 셀카 영어로는 셀피 selfie가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되었었습니다. 1839년 사진기 다게레오타이프가 만들어진지 180년 후였습니다. 그렇다면 사진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어땠을까? 초상화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익숙한 장르입니다. 초상화는 나, 타인 누구든 포함됩니다. 하지만 자화상은 스스로를 그리는 것입니다. 미술관에 가면 수많은 자화상들이 있습니다. 화가들은 왜 자신의 얼굴을 그렸을까?


고대 그리스, 이집트, 로마 시대에는 극소수의 자화상만이 발견됩니다. 자화상은 회화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습니다. 조각은 변질되거나 사라지지 않아 회화보다 조금 더 남아있습니다. 이집트 파라오 아케나텐 Akhenaten의 조각가의 머리가 초기 작품인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BCE 1365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네페르티티 Nefertiti의 흉상도 조각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조각가 피디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Battle of the Amazones>에 자신의 모습을 넣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서명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 Oil on oak panel  82x60cm National Gallery, Londonⓒwikipedia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입니다. 결혼식 하는 부부 뒤로 거울 있습니다. 거울에 네 사람이 보입니다. 푸른 옷을 입은 화가 에이크와 붉은 옷을 입은 조수, 부부의 뒷모습입니다. 그리고 거울 위에는 "얀 반 에이크 여기에 있었다. 1434년"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이 시기 실제로 결혼의 증인은 2명이 필요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화가들의 자화상은 15세기 르네상스 시기 나타났습니다. 르네상스 이전 중세는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었기에 개성과 존엄성은 중시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신분이 높은 계급이나 교황들이 화가에게 돈을 주고 의뢰한 초상화들이 많았습니다. 인본주의, 인간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라는 르네상스 정신이 나타나면서, 인간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예술가들도 새로운 시각을 찾게 됩니다.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서,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휘도 이전보다는 향상되었습니다.


(좌)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6-1541, 시스테나 성당 (우) 최후의 심판중 성 바르톨레모가 살가죽을 들고 있는 장면 ⓒwikimedia commons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중 한 장면입니다. 성 바르톨레모가 벗겨진 살가죽을 들고 있습니다. 살가죽의 얼굴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을 넣었습니다. 성 바르톨레모는 산채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로 죽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살가죽을 그리스도에게 봉헌하는 모습입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화가들은 군중 속 한 명으로 자신의 얼굴을 넣었습니다.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라파엘의 <아테나 학당>, 마사치오의 프레스코들 역시 그렇습니다. 산드레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도 군중 속 보티첼리의 얼굴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기애


'자화상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입니다. 뒤러는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자화상을 남긴 화가였습니다. 이 작품은 28세 자신의 얼굴입니다. 왼편에는 그림의 연도와 서명을 썼습니다. 오른편에는 "알브레히트 뒤러, 뉘른베르크 출신의 내가 불변의 색채로 스물여덟 살의 나를 그리다."라고 썼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500 Oil on panel 67.1x48.9cmAlte Pinakothek, Munichⓒwikipedia

당시 헨리 왕이나 왕비들의 작품들에서 정면 초상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 정면은 특이한 포즈였습니다. 정면을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예수와 닮게 하기 위해 갈색으로 머리 스타일을 바꾸었습니다. 기존의 종교화 양식처럼 어두운 톤, 대칭적 구조와 같은 형식을 가져왔습니다. 손이 없으면 그림이 평평하게 보일 수 있어서 왼손을 넣었습니다. 손과 손가락이 몸보다 앞에 위치하면서 전체적인 공간감을 선사합니다. 왼손 검지 모양 역시 예수를 따라 했습니다. 손은 창조의 의미입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줄 때 손을 올립니다. 오른손이 그림 아래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붓을 잡고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고급 모피 코트 옷은 그 당시 귀족들이 입는 고급 옷이었습니다. 화가로서의 자부심, 자기애를 예수의 닮은꼴로 그려 넣었습니다.



일기장과 같은 기록


르네상스를 지나 17세기 화가들은 화가라는 신분에 긍지를 가졌습니다. 네덜란드는 종교적 구속에서 벗어나 개인의 시각으로 사실 묘사를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대표적인 화가 렘브란트는 거울을 통해 9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렘브란트 자화상 23세 1628 ⓒRijksmuseum

23살 청년 렘브란트입니다.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이 목덜미와 왼쪽 빰에 비칩니다. 헝클어진 머리와 얼굴은 어둠 속에 보이지 않습니다. 빛과 어둠으로 심리적인 면을 부각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빛과 함께 캔버스에 담아냈습니다.


(좌) 렘브란트 자화상 1634년 Uffizi Gallery소장          (우) 렘브란트 자화상 1640 National gallery London소장 ⓒwikiar

각각 28세, 34세 때 렘브란트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청년시절 모습입니다. 청년 렘브란트 자화상들은 모피, 펜던트, 베레모와 고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에서는 값 비싼 모피 털이 눈에 띕니다. 그의 경제적 풍족함과 사회적 지위를 나타냅니다. 네덜란드 부유했던 남성들의 패션도 엿볼 수 있다. 그의 눈빛, 시선, 표정, 팔을 걸친 모습에서 자신감이 드러납니다.


(좌) 1663, Wallraf-Richartz Museum   (우) 1669, National Gallery LondonⓒWikidata

렘브란트는 30대에 두 아들과 딸, 막내를 낳고 열병에 시달리던 아내마저 잃습니다. 50세 파산을 막기 위해 그림 대부분을 판다. 오 년 후 결국 파산하고 살던 대 저택에서 강제퇴거를 당합니다. 이후 그린 그의 모습입니다. 젊은 시절 자신감 있던 눈빛은 사라졌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해진 자신을 그렸습니다. 90여 점의 자화상을 그의 일대기와 맞춰보며 보면, 그때 그의 일기장을 보듯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빛, 구도, 의상들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였습니다. 자신의 영혼에서 나타나는 가장 작은 변화를 포착해 자화상으로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얼굴의 뒤에 가라앉은 내면세계를 작은 디테일로 캔퍼스 속에 끄집어냈습니다.



내면의 상처들


47년을 살다 간 프리다 칼로는 총 143점 중 55점의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6살 때 소아마비로 9개월간 방 안에 갇혀 지냈습니다. 18살 때 타고 가던 버스가 전철과 부딪히는 사고로 척추 손상을 입었습니다. 결혼 후 세 번의 유산과 남편 디에고의 여성 편력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자화상 속에는 신체적 고통과 괴로운 심정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좌) 프리다 칼로 <부러진 기둥> 1944                          (우) 영화 프리다의 한 장면 줄리 테이머 감독, 2002


석고 깁스를 하던 그녀에게 의사가 강철 코르셋을 착용하라고 권했습니다. 실제 그녀가 착용했던 코르셋의 모습이 <부러진 기둥> 안에 드러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울고 있지 않는 무표정한 표정이다. 담담하게 고통을 견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입니다. 건조하고 갈라진 뒷 배경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대변합니다.

프리다 칼로 1946 <상서 받은 사슴> ⓒFridaKahlo.org

뉴욕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지만, 극심한 통증을 계속되었습니다. 수술 후 실망감과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어린 사슴의 몸을 한 프리다 칼로의 얼굴입니다. 사슴의 몸은 피를 흘립니다. 주변은 죽은 나무와 부러진 나뭇가지가 널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공포와 절박감을 나타낸다. 멀리 뒤로 번개가 치는 하늘이 보입니다. 사슴은 저 하늘 아래로 절대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없이 보입니다.


그녀의 자화상은 육체적 고통에 대한 트라우마의 증거였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내면을 적나라게 드러내는 표현물이었습니다.



나는 자주 혼자 있었기 때문에, 자화상을 그렸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는 나였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





공짜 모델


고흐는 거울을 샀습니다.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 년간 36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는 그림의 모델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자화상으로 다양한 형식을 시도했습니다. 20세기 예술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회화의 형식보다 내면을 탐색하고 주목하는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고흐 <Self-Portrait with Straw Hat> 1887 Oil on pasteboard, 34.9 × 26.7 cm Detroit Institute of Arts, ⓒWikipedia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표정, 옷, 배경 등을 통해 자기애, 사회적 성취, 자신감과 욕망을 내비쳤습니다. 눈빛과 신체적 자세로 내적 고통과 자기 연민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캔퍼스는 자기 고백적 일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 자신이 처한 현실 속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이었습니다. 붓을 들고 자기를 받아들이고 들여다보는 작업이었습니다.


네가 너 자신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다면 ,
어떻게 네가 다른 사람을 포착할 수 있겠나?
- Bridgetbrow-



 




참고 논문

김서진, [자화상의 형성 분석 연구], 경기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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