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여기 팝아트의 대표적인 작가 앤디 워홀이 있습니다.
앤디 워홀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검은색 안경에 은색 가발, 수줍고 내성적으로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괴짜 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팝 스타 같은 모습? 어쩌면 그의 작품 보다도 더 유명한 ‘앤디 워홀’이라는 이름.
사실 앤디 워홀이 유명했던 것에 반해 그의 생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당시 수많은 매체들과 인터뷰를 했었고, 몇 권의 자서전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와 관련된 대부분의 것들을 모호하고 확실하지 않게 이야기하곤 했어요. 그의 출생일조차 그는 위조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아마도 1928년에서 1930년 즈음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것 같습니다.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병약했고, 어릴 적에 신경쇠약증을 몇 번 앓았던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회화와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친구와 함께 200달러씩 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와서 삽화가,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생활했어요. 뉴욕으로 오면서 워홀은 그의 본명인 ‘앤드류 워홀라’에서 ‘앤디 워홀’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워홀은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밀러사의 구두 광고를 디자인하면서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에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고요. 백화점 등 상업 공간을 디자인하고, 유명 패션 잡지에 광고 일러스트를 그리는 등의 일을 하면서 디자이너로도, 경제적으로도 꽤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홀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순수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순수미술이었겠죠.
앤디 워홀의 작품들은 많이 보셨을 거예요.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엘비스 프레슬리 등 유명인들의 초상을 작품으로 만들었고 캠벨 수프, 코카콜라, 브릴로 상자 등 당시 미국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품들의 이미지를 그대로 작품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대중적인, 누구나 알 법한 이미지를 가져와서 작업하는 것을 우리는 팝아트라고 하는데요. 대중적이라는 popular의 첫 세 글자인 팝pop과 아트art를 결합해서 만든 용어입니다. 1960년대, 몇몇의 작가들이 대중문화 혹은 대중적인 이미지를 순수미술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용어이자, 당시 미술의 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워홀은 그가 살고 있었던 미국에서 그 사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찾아 작업했습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모두 똑같이 마시는 콜라. 그리고 워홀이 매일 먹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던 캠벨 수프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상품들을 비개성적으로 소비하는 당시 미국의 사회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죠.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등 유명인들의 이미지, 그리고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보도되는 주요 사건들의 이미지 역시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 생산되고 대중들에게 소비되는 것들로 미국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129명의 죽음, 자동차 사고, 인종폭동, 원자폭탄, 전기 사형을 집행할 때 쓰였던 전기의자 역시 워홀이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던 이미지들을 그대로 가져와서 작업한 것들인데요.
어쩌면 '마릴린 먼로'와 '재클린 케네디'처럼 인간의 삶과 죽음조차 '콜라'나 '수프'처럼 대량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미국의 모습, 그리고 현대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워홀은 작품의 소재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작 방식까지 'pop'적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 스튜디오를 ‘factory’라고 불렀어요. 공장처럼 만들어진 작업실에서 작품 또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상품처럼 만들었습니다. 워홀은 디자이너로 활동할 당시 경험했던 실크스크린을 작품의 제작 방법으로 사용했습니다. 실크스크린은 판화 기법 중 하나인데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선택하고 그것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여러 번 찍어서 작품을 만들었어요. 마치 공장에서 기계가 상품을 생산하듯이, 워홀은 자신의 공장에서 작품들을 찍어냈습니다. 물론 직접 찍을 수도 있었고, 그의 조수가 찍어낼 수도 있었겠죠.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같이 직접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더라도 수없이 복제되어 만들어지는 이런 창작 방식이 그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기계가 되고 싶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요.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워홀의 새로운 창작 시스템은 당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더욱더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워홀의 팩토리 모습이에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죠. 워홀의 팩토리는 할리우드의 배우들뿐만 아니라 전위적인 예술가들, 혹은 작가 지망생, 아트 딜러, 컬렉터 등 팩토리를 방문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늘 문이 열려있었다고 합니다. 쿠사마 야요이, 장 미쉘 바스키아, 그리고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논 등 많은 예술가들이 워홀의 팩토리를 찾았습니다. 여기서 워홀은 실크스크린으로 작품을 생산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1963년부터 워홀은 평소에 좋아했던 영화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는데요. 한 남자가 자는 모습을 찍은 5시간 21분짜리 영화 ‘잠’에서는 정말 한 남성이 영화 상영 내내 자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고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같은 각도로 8시간 동안 찍은 영화 ‘엠파이어’, 그리고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첼시의 소녀들’ 등이 있습니다. 예술작업 외에도 워홀은 패션, 예술, 대중문화에 관한 잡지 ‘인터뷰’를 직접 창간했고요. 1980년대에는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앤디 워홀 TV’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레코드 커버 디자인은 워홀의 유명한 바나나 이미지죠. 캠벨 수프 또한 워홀에게 광고 포스터 제작을 의뢰하면서 세계적인 브랜딩에 성공했습니다.
앤디 워홀은 예술가일까요? 혹은 디자이너? 영화감독? 공장 주인? 아니면 그냥 셀러브리티일까요?
앤디 워홀은 당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자신의 모습 또한 대중적인 유명인의 이미지, 아이콘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죠.
물론 워홀은 단지 '팝아티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