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1968년 6월 3일. 워홀의 팩토리에서 총성이 울려 퍼집니다. 발레리 솔라나스라는 한 여성이 워홀을 저격한 것인데요. 그녀는 워홀의 팩토리에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워홀이 나타나자 미리 준비했던 총을 꺼내 그를 향해 쏘았어요. 워홀은 그녀가 쏜 총에 맞아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워홀의 심각한 부상으로 병원에서는 그가 살 가망이 거의 없다고 말했고 당시 워홀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워홀은 총탄 제거 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살아났어요. 솔라나스는 그를 저격한 후 스스로 경찰에 와서 자신이 워홀을 총으로 쏘았다고 자수를 했는데요. 왜 워홀을 죽이려 했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가 내 인생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쳤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워홀의 죽음에 대한 경험.
사실 워홀은 이전 작품들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어요.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먼로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후, 워홀은 그녀의 사진 이미지를 사용해서 실크스크린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16개의 재키', '9개의 재키'는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 이후 비극적인 미망인이 되었던 재클린 케네디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한 작품이에요. 화려했던 스타의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대중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영부인의 극적인 스토리가 TV, 신문 등 대중매체를 통해 연일 보도되었을 때, 워홀은 이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워홀의 작품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어 생산되었습니다.
‘죽음’의 또 다른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1962년 6월,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해서 129명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본 워홀은 그 기사의 한 면을 세로 2.5미터 가로 1.8미터가 넘는 커다란 캔버스에 투사해서 큰 이미지로 확대하여 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를 통해서 수없이 보도되는 죽음과 관련된 많은 사건, 사고들을 작품으로 만들었는데요. 작품 <녹색의 불타는 자동차>에서 자동차가 뒤집어진 채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아홉 번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죠. 자세히 보시면 전봇대에 한 남성이 매달려 있고, 뒤편으로는 또 다른 남성이 지금의 사고에는 별다른 관심 없이 그냥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당시 잡지에 실렸던 실제 사고 현장의 모습이에요. 작품 <구급차 재난> 역시 구급차 사고 장면을 두 번 되풀이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963년 버밍햄에서 일어났던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백인 경찰들이 폭력적으로 진압했던 사건의 이미지를 작품으로 가져오기도 했어요. 당시 “개의 공격은 흑인이 받아야 할 대가이다”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실렸던 것인데요. 이 작품 역시 워홀은 실크스크린을 이용해서 같은 이미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형을 집행할 때 사용되었던 전기의자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 또한 텅 빈 공간 안에 전기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워홀의 이러한 작품들에서 우리는 그의 어떠한 비평적 발언도 찾아볼 수 없는데요. 워홀은 단지 대중매체를 통해서 보여지는 당시 사회의 이미지를 그대로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죠. 워홀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경험조차 “아무런 느낌이 없다. 총에 맞은 직후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나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어쩌면 모든 것을 이미지로 바라보는 세상, 비인간적인 상황이 현대사회의 새로운 리얼리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격 사건 이후, 워홀은 1970년 세계 박람회에서 미국관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고 같은 해에 시카고 현대미술관, 파리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미술관,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순회 전시를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 잡지 출판, TV 프로그램 출연 등 다양한 분야로 그의 비즈니스를 넓혀나갔어요. 이 시기 워홀은 굉장히 많은 유명 스타들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요.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워홀에게 모델이 되어주기를 서슴지 않았던 유명인들의 초상화로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워홀의 죽음은 그 이듬해에 다가왔습니다.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 워홀은 담낭의 문제로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실에서 잠이 든 이후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1987년 2월 22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앤디 워홀은 막대한 유산을 남겼어요. 공장에서 쉽게 찍어낼 수 있었던 그의 작품들은 그에게 많은 부를 가져다주었는데요. 기록에 의하면 워홀은 6억 달러 상당의 유산을 남겼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굉장한 수집광이었던 워홀의 집에는 인디언 예술품, 가구, 시계, 보석, 도자기, 장식품 등이 발 디딜 틈 없이 쌓여있었고 피카소, 로이 리히텐슈타인, 데이비드 호크니 등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가득했습니다. 1988년 뉴욕 소더비에서 만여 점에 달하는 워홀의 유품 경매가 열흘 동안 진행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경매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해요. 워홀의 유언에 따라 앤디 워홀 재단이 설립되었고 여전히 그의 작품 이미지들은 여러 상품들의 브랜딩, 이미지들로 사용되면서 막대한 수익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앤디 워홀’을 이야기하죠.
워홀은 말합니다.
“나는 미국을 숭배한다. 내 작품은 미국에 관한 어떠한 언급이다. 내가 그리는 이미지는 오늘날 미국의 기초가 되는 비인간적인 생산품과 요란한 유물론적 사물을 형상화시킨 것들이다. 이것은 매매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반영하고 있고, 또 우리가 양식으로 삼고 있는 일시적이고 실용적인 것의 상징이다”
그리고 또, 워홀은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앤디 워홀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저 내 그림들과 영화와 나 자신의 표면을 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앤디 워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