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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 Oct 18. 2022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뉴욕의 노숙자 수레

이것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뉴욕의 거리, 트럼프 타워 앞에 있는 한 노숙인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수레를 끌며 당당히 걷고 있습니다. 그의 수레가 조금 특별해 보이지 않나요?


사실 이 사진은 크지슈토프 보디츠코가 진행했던 '홈리스 운송수단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집이 없는 노숙자들을 위해서 수레를 만들었는데요. 이 수레는 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화장실, 개수대가 설치되어있고 빈병과 캔을 모으고 이동할 수 있는 운송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보디츠코는 왜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970년에서 80년대 미국에서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도시 재정비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보디츠코가 활동하던 뉴욕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도시 재정비사업이 진행되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도시 밖으로 쫓겨나는 사람들 그리고 살 곳을 잃어버린 홈리스가 많아졌습니다. 도시가 화려해질수록 한편으로는 집 없는 홈리스가 증가한 것인데요.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개발된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또한 위험하고, 불쾌한 존재로 여겨졌어요. 정부에서는 그들에게 수용시설을 마련해주었지만 수용소의 거친 통제를 피해서 스스로 노숙을 선택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출입이 통제된 공적인 공간과 위험이 산재한 거리 사이에서 힘겨운 생존을 지속하고 있었어요. 결국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빈병과 캔을 주어 모아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대형마트의 쇼핑카트에 자신의 짐과 병, 캔 등을 잔뜩 실고 다니는 모습을 도시에서 한 번쯤은 보셨을 것 같습니다.


보디츠코는 이 쇼핑카트에 착안하여 이들을 위한 특별한 운송수단을 만들게 됩니다. 실제 홈리스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기능들을 갖춘 홈리스 운송수단인 '노숙자 수레'만들어졌어요. 이 수레는 1988년 뉴욕 클락 타워 갤러리에서 프로토타입으로 처음 전시된 후에 1989년까지 뉴욕의 공원, 거리, 광장 등의 공간에서 노숙자들에 의해 실제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수레를 사용하는 홈리스를 통제하지 못했던 경찰은 수레에 주차위반이라는 행정제재를 가했지만, 오히려 이는 작품을 더욱 주목하게 만들 뿐이었죠. 이 프로젝트에서 ‘노숙자 수레’를 사용했던 조작자, 즉 노숙자들은 작품의 제시자이자 퍼포머, 이야기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한 시민으로서 생존하고, 노동하며, 이동할 수 있다는 권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후에 보디츠코는 이 노숙자 수레를 좀 더 발전시켜 '폴리스 카'를 제작했습니다. 작은 가솔린 엔진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숙식, 거주,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폴리스'를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폴리스 카 위쪽에 송수신기를 달아서 홈리스 간의 의사소통 네트워크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보디츠코의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노숙자의 주거에 대한 대안이자 그들의 주거 공간의 문제를 예술적인 방식으로 공론화하고 도시 전체로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1992년 보디츠코는 또 다른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이방인 스태프>라고 하는 이 기구는 지팡이 모양으로 만든 의사소통 기구입니다. 이민자들을 위해 고안한 작업이에요. 그런데 이 지팡이 왠지 낯이 익지 않나요? 보디츠코는, 구스타프 쿠르베의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에 등장하는 방랑하는 화가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에 착안하여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지팡이 모양의 기구를 이용해서 방랑하는 이민자, 난민, 망명자들의 의사소통을 돕고자 했어요. 기구 아래쪽으로 투명한 원통형의 용기 안에 시계나 사진, 출입국 증명서 등과 같은 이민자 개인의 유물들을 넣었고 위쪽으로는 작은 모니터를 설치해서 사전에 녹화된 이민자의 얼굴을 재생하도록 했습니다. 이민자는 이 기구를 사용하기 위해서 미리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직접 말하면서 녹화를 해 두었는데요. 거리, 즉 공공의 장소에서 이 기구에 관심을 보이는 내국인들에게 그 녹화 영상과 자신의 유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기구는 이민자와 내국인 사이에서 이주의 과정을 설명하고 증언하면서 그들 사이의 선입견을 없애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그리고, 특히 공공장소에서의 발언을 두려워했던 이민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이 작업은 1992년부터 6년 동안, 20명이 넘는 난민과 이민자들에 의해 바르셀로나, 파리, 뉴욕, 휴스턴, 스톡홀름, 헬싱키, 바르샤바, 로테르담 등의 도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작업에서 역시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이민자나 난민들은 퍼포머이자, 작업의 제시자, 발화자로 등장했으며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크지슈토프 보디츠코는 1943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예술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1977년에 캐나다의 노바 스코샤 대학의 방문교수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캐나다로 이주했고, 다시 뉴욕으로 이주해서 1991년부터 MIT의 선진시각연구센터에서 디렉터로 지냈습니다. 2010년부터는 하버드 대학원 공공미술 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요. 사회주의 폴란드에서의  경험과 망명 후 이민자로서의 경험이 그의 작업 방향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디츠코는 앞의 작업뿐만 아니라 공공 건축물 혹은 기념비의 표면에 특정한 이미지를 일시적으로 프로젝션 하는 ‘공공 프로젝션’ 작업들도 진행했습니다. 주로 사회적 약자, 인종차별, 전쟁, 개인과 사회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문제들을 노출시키고 민주적 공공 공간에서 다수의 불특정 관객을 대상으로 망각되었거나 혹은 감추어진 사회의 이슈들을 드러냈습니다.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의 창조자들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를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환각상태에 빠트리고 있는 것이다.”라는 그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메시지 또는 어떤 정답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통해 스스로 질문하고, 공론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보디츠코의 작업들을 통해서 ‘공공’ 장소에서 행해지는 ‘공공미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여전히 공공미술이 ‘공공장소에 설치된 미술작품’으로 인식될 수 있는 우리 사회에서 보디츠코의 사회, 역사, 정치적 개입으로의 공공예술 작업은 공공미술의 담론을 확장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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