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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 Oct 17. 2022

완벽한 연인,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첫 번째 이야기




여기 두 개의 시계가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두 개의 시계는 시, 분, 초까지 완벽히 같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자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점점 어긋나게 되는데요. 결국 둘 중 하나의 시계가 먼저 멈춰버리고 맙니다. ‘완벽한 연인’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쿠바 출신의 미국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이에요. 


별다른 설명이 없더라도, 이 작품 앞에 서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완벽한 사랑’에 대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요. 같은 시각을 가리키던 두 시계, 완벽한 연인.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멈춰버릴 시계처럼, 언젠가는 다가올,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비어있는 침대를 찍은 사진이에요. 이 작품은 1991년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를 비롯해서 뉴욕 시내 스물네 곳에 옥외광고판으로 설치되었던 작품입니다. 작가가 사랑했던 그의 연인 로스와 함께 누웠던 흔적을 찍은 사진이에요. 헝클어진 이불,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베개 위의 머리 자국을 보면 방금 전까지도 침대 위에 있었을 연인의 모습이 상상되기도 합니다. 이 사진이 시내 곳곳 옥외광고판에 설치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어쩌면 그냥 ‘침대 광고’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시기간 동안 계속해서 이 사진을 접하면서 문득문득 다른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침대, 나의 침대, 혹은 다른 누군가의 침대, 우리의 침대…  그리고 지금은 덩그러니 비어있는 공허함. 왜 작가는 자신의 침대 사진을 시내 곳곳에 설치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여기,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갤러리 바닥에 무언가 카펫처럼 깔려있는데요. 자세히 보시면 작은 사탕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관객들은 미술관 전시실 안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동시에 많은 사탕들 중 하나를 골라 입에 넣고 사탕의 달콤함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원하는 만큼의 사탕을 가져갈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작가는 왜 사탕을 작품으로 가져와 전시실에 펼쳐 놓았을까요?


작품의 제목은 따로 없지만, 특별히 ‘러버보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자신의 몸무게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작가의 동성 연인 ‘로스 레이콕’의 몸무게를 합한 355파운드의 사탕을 미술관 바닥 혹은 구석에 수북하게 쌓아 만든 작품이에요. 사탕의 무게와 ‘러버보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사탕은 곧 그의 연인이었던 로스와의 달콤했던 추억이기도 하고, 또한 이제는 사라져 버린 연인의 몸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관객들은 작가가 작품, 사탕으로 제시한 다른 사람의 몸을 입 속에 넣고 그것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입 안에 녹아들어 가면서, 그렇게 작품은 많은 관객들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전시장에 놓여있던 355파운드의 사탕은 관객들에 의해서 점차 사라지다가 마침내는 소멸하고 마는데요. 하지만 전시기간 중에는 항상 355파운드의 무게에 맞춰 계속해서 사탕이 다시 채워지면서 끊임없이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게 됩니다. 마치 사라진 로스의 몸이 다시 부활하고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요.

관객들은 전시실에 놓여있는 사탕 하나를 집어 들어 껍질을 벗기고 그것을 입에 넣는 순간의 달콤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작가와 그의 연인에 대한 안타까운 애도의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내 입안에서 사라지고 말 사탕의 달콤함 끝에 누군가는 자신의 옛 추억, 연인, 잃어버린 무언가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죠. 사탕은 작가에게는 연인 로스의 몸이지만, 그것을 먹는 관객에게는 각자의 개인이 잃어버린 혹은 원하는 누군가의 몸이자 추억일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입 안에서 사탕이 다 녹아 없어진 후, 사탕의 달콤함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실, 공허함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는 이 작품이 자신에게 다가올 엄청난 상실을 미리 경험하기 위한 연습이었다고 말합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공포를 줄이기 위해 공포를 연습한다고 했다… 따라서 정적인 형태의 단단한 조각을 거부하고, 소멸하고 변화하며 불안정하고 연약한 형태를 만드는 것은 바로 눈앞에서 하루하루 로스가 사라져 가는 공포를 연습하기 위한 내 노력이다.”


“이 작품은 내 모두를 잃는다는 공포로부터 탄생했다. 이 작품은 내 스스로의 공포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내 작품은 파괴되지 않는다. 내가 이미 첫날부터 파괴해버렸으니까. 이는 마치 누군가와 연애를 하면서도 결국에는 이루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이 보이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따라서 그는 당신을 떠나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첫날부터 이미 당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것들이 내 인생에서 사라졌듯이 혹은 나를 떠나갔듯이 그렇게 소멸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스스로 파괴한 것이다.” 


작가는 녹아 없어질 사탕, 멈추고 말 시계 등을 통해서 고통과 환희,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는 1957년 쿠바에서 태어났어요. 1970년대 후반 뉴욕으로 이주한 후, 뉴욕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작가인데요. 동성애자였던 그는 에이즈로 인해서 1996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8년을 함께 했던 그의 연인 로스 레이콕 또한 1991년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죠.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작가로 활동했지만 여러 가지 매체를 사용해서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고, 특히 작가 사후 10년이 지난 2007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미국관을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되기도 하면서 여전히 현대미술에 다양한 영감을 주고 있는 작가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서 관객들과 독특한 관계를 맺게 되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평론가 니꼴라 부리요가 말했던 ‘관계의 미학’을 엿볼 수 있는데요. 그는 곤잘레스-토레스가 만들어낸 것은 미적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을 매개로 성립되는 사람들과 세상 사이의 관계라고 이야기하면서 곤잘레스-토레스를 대표하는 199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성격을 ‘관계의 미학’이라 말했죠.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더 많은 작품들, 작품세계가 궁금하실 것 같은데요. ‘관계의 미학’, ‘공공미술’로 논의되는 그의 작품들,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대중들과 관계를 맺고 나아가 공공미술로 논의되는지.

다음 편에서 더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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