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2250m, 그곳에 행운을 두고 온 여행자
|. 빛의 속도
빛의 속도. 나는 빛의 속도로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예정보다 늦은 이륙으로 밤 10시 반이 다 돼서야 도착한 OZ105. 막차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비행기 덕분에 졸지에 공항 카트 레이싱을 하게 되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내 입은 참았던 험한 말을 쏟아낸다.
불을 뿜는 분노의 입에 점점 속도가 붙더니, 떠나는 버스를 꼭 잡아타고 말겠다며 가까스로 4B 구역 버스 승강장에 도착했다. 빛의 속도로.
10:52 pm. 가까스로 4B구역 앞.
맙소사. 방금 막 버스 한 대가 떠났단다.. 다음에 버스는 20분 후인 11:10 pm. 버스. 바로 오늘의 마지막 버스다.
'어떻게든 20분만 버텨보자.'
시차와 추위와 비행기 멀미가 지배하는 시간. 털은 왕창 뜯기고 병든 닭 같은 나는 승강장 모니터의 디지털시계를 노려본다. 일분, 또 일분. 가자미 눈을 하고 날카롭게 노려 보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때였다-
공항 가로등이 비추는 하늘 위로, 나뭇잎 만한 눈송이가 펄펄 쏟아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걸 멍- 하니 바라본다.
이내 엄청난 속도로 낙하하는 눈송이 부대를 보며 "곧 그칠 거야, 곧 그칠 거야" 얄팍한 주문을 외워본다. 그간 참 꾹 참고 있었던 눈을 하필 지금 퍼부어대다니, 3주 만에 만나는 한국 날씨가 이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연착과 막차,
거기에 '폭설'이라..
휘몰아치는 눈을 바라보던 나는 급기야 "허허허-"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 내어 헛웃음을 뱉어버렸다. 솟아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 찰싹 붙어 내 뒤에 서 있던 20대 초반의 커플은 좀비 같은 나를 보며 움찔한다.
"이번 역은 이 버스의 종착역, 역삼역입니다"
막차 공항버스의 끝 손님이 된 내가 테헤란로에 내린 시각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불빛마저 아득한 테헤란로는 이 세상 날씨는 아닌 듯 한 스케일의 눈으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언제나 친절한 공항버스기사님은 마지막까지 완벽히 임무를 수행하신다. 모두 일곱 덩이나 되는 내 짐을 짐칸에서 차례차례 내려주시고는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두 덩이의 캐리어, 하나의 백팩, 조명이 든 박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구매한 미술 작품이 든 가방들이 연이어 길 위로 쌓이고, 그 위로 눈송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아주 신나게 쌓이기 시작한다.
지금 나는 정녕 스노우볼 안으로 들어온 것이란 말인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거미줄 같은 정신줄마저 하마터면 놓칠 뻔 한 순간, 헐겁게 쌓인 내 짐덩이들이 미끄러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행운을 어디에다 두고 온 게 분명해.. 그게 아니라면..!
쏟아진 가방이 이내 내용물을 토해냈고, 화려한 스팽글 장식이 예뻐서 산 솜브레로(somvrero, 멕시코 전통 모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로 뱅글뱅글 춤 춘다.
나 다시 돌아가련다...
||. "짜잔! 나는 곧 멕시코 시티로 떠납니다!"
멕시코 시티로 간다는 내 발표에 돌아오는 주변 반응은 모두 걱정, 걱정 또 걱정, 오직 걱정뿐.
"거긴 정말 위험해! 조심해야 된다!"
"여행 위험 지역 아닌가?"
"예방접종 같은 거 챙겨 맞아야 하는 거 아니야?"
"작년처럼 지진 나면 어쩌려고!"
메들리처럼 들리는 주위의 걱정 덕에 여행을 준비하는 내 심리는 기대감으로 벅차올랐다가 점차 불안감, 혹은 기절 감?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멕시코 시티 도착 전까지 극도로 예민해진 상황.
하는 생각에 이르자, 전전 긍긍하다 결국 아리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멕시코 시티? 멕시코 시티로 자주 휴가 가는 친구가 있는데, 거기 진짜 좋다던데?
그렇게까지 걱정할 만큼 위험하지 않데!"
휴우. 다행이로구나-
아차. 그러고 보니,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 중에 실제로 멕시코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마음을 조금 진정해보려 했다.
그럼에도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자 '멕시코시티에서 가면 안 되는 지역', '하면 위험한 행동', '조심해야 되는 사람 유형' 등을 일일이 찾아 읽었다. 여행 전에 가야 할 미술관과 갤러리, 그리고 숙소 밖에 찾아보지 않는 내가, 멕시코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태껏 한 번도 하지 않은 여정 동선, 지도까지 섭렵할 정도였으니.. 긴장과 걱정이 나를 얼마나 부지런한 여행자로 탈바꿈시켰는지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뉴욕 뉴왁 Newark 공항에서 멕시코 시티까지, 약 7시간을 날아 도착한 멕시코 시티 공항에서 나는 출국장을 나서자마자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서서 픽업 서비스를 기다렸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잠시라도 서 있을 때 등을 벽에 꼭 붙어 서 있으라고, 프랑스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을 아직까지도 잘 지키고 있다!)
|||. 여기저기, 반가운 "올라 Hola!" 소리에 사르르 녹는 이 마음
"Hola! Are you Miss Koo?"
".. yes...?"
살았다! 나는 픽업 스텝을 따라 차량을 타고 안전하게? 공항을 벗어나 숙소로 갈 수 있었다. 안전 여부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숙소로 가는 길 내내 멕시코 풍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사가 맞는 길로 가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나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열심히 그의 내비게이션을 바라보며 내가 찾아본 길과 비교해 본다.
하지만 이런 나의 경계심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기까지 불과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숙소 도착.
"Hola! 저는빅토르 입니다. 한국에서 오셨나요? 멀리서 오셨네요. 멕시코 여행은 처음이신가요? 그렇다면 정말 환영합니다! 멕시코 시티는 정말 흥미로운 도시에요! 아마 좋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미스 쿠의 새로운 친구 '빅토르'라고 생각하시고,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하세요!"
숙소에 막 도착한 나를 반갑게 맞은 사람은 상냥하고 따뜻한 미소가 인상적인 '빅토르'였다. 간만에 누군가 진심으로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그간의 긴장감은 어느새 사르르 녹아버렸다.
침대에 퍽-하고 뛰어들어 지친 몸을 잠시 뉘았다가, 갑자기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순 없지! 싶어 숙소 근처라도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멕시코에 왔으니 타코 Taco부터 안 먹어 볼 수가 없었다.
숙소 근처에 있는 소박하고 정겨운 분위기의 엘 까미네로 El Caminero에서 나는 만족스러운 멕시코 첫 타코를 먹을 수 있었다. 혼자 와서 와구와구 맛있게 잘도 먹는 내가 신기한지 바라보던 매니저가 추천해준 모델로 modelo 맥주와 함께.
역시, 풍족한 양과 만족스러운 맛이란 쪼그라든 위장과 내 영혼에 빵빵한 공기를 주입해주는구나.
두둑해진 배를 만져보며 길을 나섰다.
||||. 이 커피 한잔을 다 마시고, 다시 힘을 내 보자
타코 집을 나와 바라보니 커다란 광장(리퍼블릭 스퀘어 Republic Square) 중앙에 솟은 멕시코 혁명기념비(Monument to Revolutio)가 한눈에 들어온다.
리퍼블릭 스퀘어를 크게 돌며 풍경을 감상하니,
어느덧 여유롭게 멕시코 시티를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리퍼블릭 스퀘어 안에는 혁명 기념비 뿐만 아니라, 혁명 박물관이 있었고, 광장 곳곳에는 친구끼리 나와 보드를 연습하는 청년들과 분수 근처에서 물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광장을 가로질러 바쁘게 길을 건너가는 회사원, 대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멕시코의 일상이 있는 광장의 풍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커피 마신다는 걸 잊고 있었구나..!
테라스가 넓은 카페 스타일의 펍이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키는 사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와 앉았다. 잘 알아들을 순 없지만, 아마도 내가 가려고 한 아트페어에 다녀온 사람들로 보였다. 다시 보니 한눈에 갤러리스트, 혹은 아트 딜러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Material Art fair 2018
그들의 테이블 위로 내가 갈 예정인 머티리얼 아트페어 팜플랫이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숙소를 예약한 아리엘이 아트페어에서 정말 가까운 숙소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찾아보니 역시나 이곳을 따라 난 길 끝자락이 아트페어가 열리는 홀 hall이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오후 4시.
머티리얼 아트페어는 9시까지 오픈이라 사실 숙소로 돌아가 옷을 잘 차려 입고 가려던 참이었다. 소중한 인연을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냥 지금 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오늘은 아트페어 오픈 첫날이고,
이제 막 시작하는 축제의 그 들뜬 현장 분위기를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내가 겉치레에 신경을 쓰고선 지금 갈지 말지 생각하고 있었다니, 정말 불필요한 고민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아트 페어에 들어가자마자 들었다.)
나는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켜 비워냈다.
그래, 이 커피 한잔을 다 마시고 다시 힘을 내 보자!
하며 말이다.
커피값을 계산하러 내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카운터로 갔다. 카운터 맞은 편의 벽에는 회화 작품 몇 점 전시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주말에 디제잉도 하고, 시즌마다 젊은 작가들의 전시 열리는 아티스틱한 공간이었다. 우연히 그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온 곳이 이런 멋진 곳이라니 나는 운도 참 좋지- 하며 기쁜 마음이 들었다.
좋아,
시작이 마음에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