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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Jan 19. 2024

이제 자신만 생각하세요.

2학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수업을 시작해야 한다. 지난 학기를 연구년으로 강의를 쉬어서  코로나 때문에 동영상 촬영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어 긴장돼서 아침부터 일찍 일어났다. 컴퓨터를 켜고 LMS에 들어가서 수업 예약이 제대로 되었는지 줌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하고 화장을 했다. 며칠사이 얼굴은 검고 축 늘어져 보였다. 2주 사이에 10년은 늙어 보이는 얼굴에 화장을 하며 나 자신의 얼굴이 너무도 생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 없이 눈가에 가득한 검은 그늘과 입 주변으로 늙어진 살들.. 나의 젊은 시절 아름답고 건강했던 표정은 어디로 도망간 걸까? 나의 시간과 젊음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10년간 나를 약탈하고 갈아먹으면서 늙고 병들어가는 나를 조롱했었다. 인간들이 이렇게 사악할 수 있을까?


생각을 멈춰야 한다. 올라오는 감정을 잠시 멈추고 수업에 집중하고 나의 일상을 찾아야 한다. 내가 지금 하는 생각들은 나를 좀먹는 것들일 뿐, 일은 어차피 벌어지고 모든 사단은 터지게 마련이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하지 않던가?     

어제부터 6개월 만에 언니가 문자와 카톡을 계속 보내서 엄마, 아빠의 용돈에 대해 뭐라고 하는데 도무지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말투로 봐서 비난과 신경질이 가득했다. 늘 나에게 의지해서 뭐든지 해결하라고 나에게 미루던 언니가 이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안달이 났나 보다. 마음도 불편하고 읽고 나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핸드폰을 꺼 버렸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이뤄온 삶이었다. 그런데 난 왜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걸까?     

어제 병원에서 상담을 하며 의사에게 이야기를 했다.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그러세요.”

“제가 왜 이렇게 나쁜 인간에게 끌렸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저희 부모님은 올해 여든 살이세요. 두 분 다 그 시대에 흔치 않게 대학교육을 받으셨고 어머니는 약사셨고, 아버지는 가구점을 하셨어요. 경제적으로 아주 나쁘진 않았는데, 문제는 아버지가 너무 착하셔서 늘 사기를 당하는 거예요. 엄마가 해결하기에도 벅찰 만큼 남 도와주는 게 우선이라서 사기를 당하고도 욕도 못하고, 따지지도 못하고 늘 당하고만 사니.. 어머니는 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그래서 난 가족부터 생각하는 강한 남자를 원했던 것 같아요. 전남편을 만나면서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예단과 키를 몇 개 챙겨 오라는 몰상식한 말과 밤낮없이 전화해서 욕을 해대는 어이없는 행동에 기가 찼어요. 도망가고 싶었지만 전남편이 내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믿고 따른 거예요. 이제 보니 앞서 김경아라는 여자가 도망가는 걸 보고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용기를 냈던 것 같아요. 


언제나 전 제가 선택하는 삶을 원했어요. 엄마가 원하는 전공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전공을 선택해서 진학했고, 처음 대학을 떨어져서 후기대 4년 장학금을 받았지만, 제 선택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부모님 모르게 재수를 시작했고 결국엔 제가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게 된 거죠. 합격하고 나서 과외 아르바이트로 등록금과 용돈을 벌 수 있었고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들어와서 새벽까지 여동생을 가르쳐서 원하는 학교에 합격시켰어요. 

그런데 대학교 4학년 때 엄마가 사기를 당해서 집안이 난리가 난 거예요. 엄마는 병원에 입원하시고 아버지는 술만 마시고 안방에 쓰러져있고 빚쟁이들을 내가 상대하게 된 거예요. 아버지는 당신은 무서워서 빚쟁이들 못 만나니까 네가 해결하라며 문을 잠가버리셨어요. 22살짜리가 무슨 힘이 있었겠어요. 세상이 무섭고 버겁고.. 저렇게 나약한 부모가 되지 말아야지.. 저런 아버지 같은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지... 그게 제 신조였어요. 최소한 책임지려고 노력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강하고 도전적인 전남편에게 끌렸던 것 같아요. 화나면 눈에 보이는 것 없이 소리 지르고 막 나가는 다혈질이 끌리고 그게 능력이고 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여전히 부모님은 언니가 형부와 싸우면 저한테 가보라고 하시고, 동생네가 문제가 생기면 거기도 네가 가보라 하시고.. 언제부턴가 전 절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게 저더라고요.


그래서 도망치듯 결혼했는데, 시부모가 이런 시궁창일 줄은 정말 몰랐고... 그 시궁창에서도 연꽃이 피듯이 전남편은 자기 부모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극복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더 끔찍한 인간이었던 거예요. 불우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불쌍해서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늘 따뜻하고 안정감 있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전남편 오기 전에 좋아하는 저녁 준비하고 전 술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있지도 않았어요. 늘 가족과 함께 하고 예쁘고 정갈한 집을 꾸미는 게 저에게도 꿈이어서 전남편과 같은 꿈을 꾼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전남편은 외부적으로는 그런 가정의 가장으로 살면서 사실은 다른 본능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그렇게 불안했던 가정의 분위기가 스릴 있고 짜릿한 기억으로 남은 왜곡된 인간이었다고 생각되더라고요. 

전 이제 저만 생각하고 싶어요. 부모, 형제 챙기고, 전남편 챙기고 아들들 챙기다가 몸도 마음도 지쳤는데, 정작 내가 배신을 당하고 보니 세상이 무섭고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지금 이런 이야기하면서도 선생님이 혹시 전남편에게 알릴까 봐 걱정되고 의심이 드는 게 사실이에요. 저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제 자신만 생각하세요.”

“선생님 그래도 될까요? 저 이제 이기적으로 나만 보호하고 살아도 될까요?”   

“지금은 교통사고 당하신 거예요. 상처는 남겠지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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