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참 많은 것 같다. 밤새 필요한 것들을 주문하고 나니 택배가 서른 가지가 넘었다. 그중에는 내가 언제 주문했는지도 모르는 것들도 와 있었고 똑같은 것을 또 주문한 것도 있었다. 정신줄 꼭 붙잡고 살아야 한다고 이 악물었지만, 순간순간 정신줄을 놓치고 있었나 보다. 택배상자를 열고 물건을 꺼내고 상자를 정리해서 분리수거하는데만 오전시간이 다 지나 버렸다.
다음 주면 개강이라서 수업 준비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아 진척이 없었다. 교재출판을 하기로 한 출판사에서는 계속 연락이 오는데 그저 알아서 하라고 난 아무래도 좋다고 간단한 답만 할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회의나 수업을 줌으로 하기 때문에 집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의 상태는 문밖조차 나가기 힘든 심한 우울상태였기에. 개강 교수 회의를 줌으로 참석해서 정년퇴임식과 명예퇴직을 하는 교수님들의 인사말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해봤다.
‘난 과연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도 명예롭게 퇴직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내일도, 다음 달도, 내년도 예상이 되질 않는다. 아무것도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무서웠다. 이혼은 나의 계획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남편의 불륜과 상간녀는 나의 인생 시나리오에 없었던 단어들이었다.
나의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흔히 하는 말로 김태희랑 살아도 전원주랑 바람난다잖아.”
“옛날 영화 중에 ‘내겐 너무 이쁜 당신’이라는 영화 보면 거기서도 남자 주인공이 아내가 그렇게 우아하고 지적이고 완벽한데, 뚱뚱하고 못생긴 여비서랑 바람나는데, 아내가 자신에겐 너무 과하게 잘나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비서랑 바람난 거야. 다이애나비랑 찰스 황태자 봐. 파멜라라는 그 유부녀한테 다이애나비가 밀렸잖아. 거기도 늙고 못생긴 파멜라가 찰스 황태자의 첫사랑이었다더라.”
“ 그래... 아널드 슈워제네거 봐봐. 케네디가의 그 이쁘고 완벽한 와이프 두고 집에서 일하던 늙고 뚱뚱한 청소부랑 내연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혼외자도 낳았다잖아! 네 전남편은 네에게 열등감이 심해서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상간녀랑 바람난 거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어디야? 나이 60 넘어 70이다 돼 가서 알게 되면 그땐 정말 이혼도 쉽지 않았을 거야!"
"네가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이 너에게 기회를 주신 거야. 네가 존중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 준 거니까 고마워해야 해."
짐 정리를 하다가 남편이 여행가서 내게 보낸 엽서를 찾았다.
이 엽서는 2011년 8월에 간 여행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상간녀와 함께 한 여행에서.
왜 상간녀와 함께 간 여행에서 나에게 이런 로맨틱한 엽서를 보낸 것일까?
그 때는 그저 기쁘고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 가증스러운 엽서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든다.
상간녀가 보는 앞에서 이런 엽서를 쓰면서 상간녀를 질투하게 만들고, 방학 중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학교로 엽서를 보내서 조교는 내용을 보고 '교수님 사부님이 너무 로맨틱 하신 것 같아요. 좋으시겠어요~' 라며 연구실로 가져왔었다. 그리고 나의 강박적인 계획성으로 짐챙기기, 호텔예약, 일정 관리, 예산 정리 등 항상 쉽게 자신의 몸만 챙기고다니던 여행이 불편했기에 용도확인을 위해서 쓴 것일 것이다.
엽서를 통해 불륜중에도 자신은 본처를 생각하고 있다고 연극을 하고, 이런 행동으로 자신의 불륜 행동에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려고 한 것이다. 너무도 가증스럽고, 허세스러운 행동이 역겹고 분노에 치가 떨렸다.
그런데 이 연극의 조연인 내가 갑자기 사라지고 나니 연극을 계속 할 수 없으니 화가 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내가 빠져나온 무대에 대해 미안함과 우울감을 느끼며 스스로 벌을 주고있다. 전남편의 잘못을 내 탓이라고 탓하고 나 자신을 너무 괴롭히고 있다.
"세상에 아들 수능이 코 앞인데 집을 나가는 엄마가 어딨냐며" 내 탓을 하고 있다는데, 내가 좀더 참아야 했을까? 내가 아들의 인생에 너무 큰 잘못을 한 건 아닐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자신감 없고 나약해졌는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해 본다.
“ 내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난 잘못하게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