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미 Jun 01. 2020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 서울엔 한강이 있어서 참 좋아

게으른 사유의 끄적거림


출근길이 꽤 멀다.

9호선과 2호선을 이용하는데 급행 노선을 활용해서 환승을 두 번이나 해도 최단거리 45분이 걸린다.


사람을 콩나물 시루떡으로 만들어 나르는 악명 높은 9호선과 언제나 사람이 많은 2호선에서 앉아서 출근하길 기대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 무료한 시간을 버티기 위해 출근길 집을 나서기 전 가장 가벼운 책을 골라 손으로 무게를 가늠하고 가방에 넣어 다닌다. 하지만 책을 펴보지도 못할 때도 많고 도저히 읽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쳐서 퇴근하는 일도 많다.


그만큼 출근길도, 퇴근길도 지치는 시간이다.

물론 마음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출퇴근 지하철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구간이 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한 템포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그 구간이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이다.


당산역과 합정역을 지나는 구간은 창밖으로 한강이 보이는 구간으로 내가 출근하는 지하철 노선에서 유일하게 밖이 보이는 곳이다.


아침 출근길, 창 너머 보이는 한강은 아침 햇살을 안고 반짝반짝 은빛 물결을 살랑대면서도 잔잔하게 또 평화롭게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20대 초반 한강을 자주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땐 뭐 대단한 청춘이라고 딱히 고민도 없었으면서 세상이 너무 심오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나른한 표정으로 한강 건너편 번개표 빌딩이 보이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 멍을 때리다 의미 없이 돌아오곤 했었다.


그렇게 한강을 찾고 나면 친구들에게 자주 말했었다.



서울엔 한강이 있어서 참 좋아.



그때부터였을까 한강은 나에게 위로였다. 바다가 없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위로를 줄 수 있는 큰 물줄기 같았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 매일 다니는 출근길에도 한강은 여전히 위로를 준다. 무료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의미 없는 검색을 하다가도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에 한강이 보이기 시작하면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한강을 바라본다.


아침에 일렁이는 한강은 유난히 평화롭다. 출근하면 사방이 막힌 건물에 들어가서 오랜 시간 근무하는 나에게 이 짧은 여유는 하루 중 온전히 해를 보고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만의  ‘한강 바라보기 타임’은  성스러운 의식처럼 하루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강의 모습은 날씨에 따라서 매일 조금씩 얼굴을 달리하기도 한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은 국회의사당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하고 흐린 날에는 회색이었다가 어느 날은 은회색이었다가, 또 어느 날은 유난히 해를 많이 받아서 보석처럼 반짝이기도 한다. 매일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한강은 늘 그대로 고요하고 잔잔하게 흐른다.



그러한 모습이 아름다워 유난히 감동적일 때는 잠시 눈을 감고 ‘오늘 하루 한강처럼 저렇게 고요한 마음으로 보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는 날도 있다.



퇴근길 또한 다르지 않다. 요즘은 해가 길어져 노을이 걸리는 시간에 퇴근을 하면 그야말로 럭키다. 퇴근길에 운 좋게 앉아 있더라도 한강을 볼 수 있는 구간을 지날 때면 사람들 시선에 조금 머쓱하지만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본다.


아침에 고요하고 평화롭던 한강은 저녁이 되면 아름답게 변한다. 노을이 모두 지나간 자리의 한강은 예쁜 야경의 옷을 입고 아름답기를 기다린다.



프랑스를 다녀온 어느 지인이 센 강을 직접 가보고 엄청난 기대에 반해 실망이 컸으며 한국의 한강이 더 예쁜 것 같다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난 센 강은 가보지 않았지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뭔가 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강을 오래 본 만큼  변함없는 매력을 익히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애정이 깊을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출근길은 늘 힘들다. 또 퇴근길은 지친다. 어느 날엔가는 영혼이 탈곡되었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힘든 날도 있다. 하지만 출퇴근길 하루 두 번 평화의 아름다움을 마주 할 수 있는 ‘한강 바라보기 타임’이 있어 빼곡한 서울에 사는 우리가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은 아닐까.


매일 당산역에서 합정역을 지나쳐가는, 합정역에서 당산역을 지나쳐가는 누군가에게 잠시 고개를 들어 창 밖에 한강을  바라보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분명 위로를 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그렇게 살아줄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