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 시절 한때는 나이 든 후에도 공부든 뭐든 마음만 먹으면 식은 죽 먹듯 언제든 해치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최근 들어 노안이 심해지고 부쩍 체력이 달리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다 보니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그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의 인연도 마찬가지라 생각했었다. 인연이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 굳이 인위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진 적도 없었고 물 흐르듯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최상의 만남이라 생각했다. 확고한 그런 신념 때문이었는지 누군가 급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들면 거부반응부터 일으킬 정도였고 무리하게 일정을 잡아 만나자는 사람이 있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갖은 핑계를 대며 피하기만 했다.
그렇게 살아도 만날 사람은 다 만났고 이어질 인연은 다 이어졌다. 비록 부르면 언제 어디서든 달려올 인연이 몇 남지 않았지만 살아감에 있어 큰 불편은 없었다. 사람에 치이고 상처받고 배신감을 느낄 확률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니 마음은 오히려 더 편했다. 나와 내 주변만 단속하면 딱히 책임질 일도,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 후회할 일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난생처음 후회란 것을 한 적이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고 해마다 이 맘 때만 되면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자책을 하게 만든 사람은 온라인으로 인연을 맺은 윤찬 씨(가명, 이하 생략)였다.
윤찬 씨는 2012년 한 기타 카페를 통해 인연을 맺은 친구였다. 당시 그 카페에는 나와 동갑인 친구가 꽤 많았었는데 언젠가 한 번 언급했던 수야(관련 글 https://brunch.co.kr/@arwen/153)도 거기서 맺은 친구 중 하나였다. 한때 '공포의 돼지들(71년 산 돼지띠)'이란 별칭까지 얻을 정도로 다들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 시기에 유난히 말수가 적고 낯가림이 심해 잘 어울리지 못하던 친구가 윤찬 씨였다.
거의 등 떠밀리듯 돼지들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던 내게 윤찬 씨는 넘어야 할 산 같은 존재였다. 다들 '야자!'를 할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는 와중에 윤찬 씨 혼자 존댓말을 쓸 정도로 겉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그를 무리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고 그 중책을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만날 수 있는 사람들부터 우선 만나는 게 좋겠다는 나의 지령(?)에 서울과 경기도 쪽에 사는 친구들의 만남이 성사된 것을 계기로 윤찬 씨도 서서히 소모임에 참석하는 등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윤찬 씨에게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그 흔한 댓글 하나 제대로 달지 못할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타던 그 친구는 어느새 적극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오프 모임이 열린다는 소식이 있으면 빠짐없이 참석했고 자신의 취미 생활인 LP판을 이용한 음악 감상과 여행사진 촬영에 대한 글도 꾸준히 올렸다.
그때마다 그는 내게 감사함을 표시하곤 했다. 수면 아래에서 유령회원처럼 활동하던 게 일상이었던 사람을 수면 위로 올려준 게 나였다고 했다. 거리가 멀어 당장 만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시간이 되면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당연히 형식적인 인사일 거라 생각했기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며 립서비스에 가까운 답을 하곤 했다.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처럼 사람과의 만남에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정을 느꼈던 윤찬 씨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틈만 나면 내가 사는 창원으로 찾아가겠다는 말을 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러다 말겠거니 생각했는데 그 해 초가을, 아예 하루 날 잡아 회사에 휴가를 내고 내려올 계획이란 말을 들었을 땐 그게 진심인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 비상이 걸렸다. 얼굴 한 번 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고 생각한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만 야간 근무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만날 시간이라고 해봤자 고작 점심 한 끼와 커피 한 잔 정도의 시간뿐인데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새벽에 출발해서 몇 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그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게다가 대구에 있는 친구 수야를 픽업해서 같이 오겠다고 하니 기다리는 입장에선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근무시간을 조절하는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만날 수도 없었다. 수야도 그 말을 전해 듣고 말도 안 되는 일정이라 만류했다. 우린 아직 젊다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테니 서두를 것 없다는 우리 두 사람의 설득에 윤찬 씨도 마지못해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게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은 9월 23일, 카페에 올린 새 글을 통해 그는 몸이 좋지 않아 급히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행히 수술도 잘 되고 경과도 좋으니 걱정 말라는 짧은 글에 회복 잘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바란다는 댓글을 달았다. 답글은 없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일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수술 후 4일째 되던 날 새벽, 근무 도중에 받은 카톡 한 통은 내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했다.
"동생이 수술 후 회복 중 어젯밤 갑작스럽게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충격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후로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윤찬 씨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곧 다가올 12월 7일은 윤찬 씨의 생일이고 페이스북에는 어김없이 알림이 뜬다. 바쁘다는 핑계로 1년에 한 번 찾을 뿐인 그 공간에는 아직도 그가 남긴 글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중에서 살아생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나미의 '슬픈 인연'이라는 곡의 영상을 볼 때면 쉼 없이 돌아가는 LP판처럼 그의 인생이 멈추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후략>'
얼마 전 있었던 10.29 참사처럼 대부분의 이별은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다. 가까이는 후배 남편이 나 홀로 캠핑을 갔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딸아이의 유치원 친구 아빠가 가벼운 감기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급성폐렴으로 갑작스러운 이별을 고하기도 했다. 윤찬 씨와의 이별도 그랬다.
아마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죽음이, 그리고 누군가와의 이별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이별을 준비하며 살고 있다. 이별 준비라고 해서 거창하게 뭔가를 정리하거나 남기는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 죽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가급적이면 내가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할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애쓰는 것뿐이다.
최근에는 잠자리에 들며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지 못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50년 넘게 살았으면 많이 살았다는 생각과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늘 부딪히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잠들 때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당신들은 이별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요?
한 번쯤 깊이 고민해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페이스북에서 윤찬 씨와 나는 여전히 친구 사이이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고 턴테이블을 이용해 LP로 음악 듣기를 좋아했으며 누구보다 기타에 열심이었던 사람, 윤찬 씨가 이 글을 읽는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윤찬 씨, 잘 지내고 있어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내게 다시 그날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대전쯤에서 만나자고 말하고 싶어요. 거리상 제가 좀 손해 보는 거 같긴 합니다만 그 핑계 대고 나도 농땡이 칠 수 있으니 서로가 좋잖아요.
거긴 어때요? 예전에 당신 카페 활동할 때 닉네임이 쏘다니스트였잖아. 거기서는 열심히 잘 쏘다니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곳에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요. 아, 그리고 페이스북에선 우리 아직 친구라고 전해주고 있어요. 저거 내 손으로 취소 버튼 누르기 전까지는 유효하다는 거 알죠? 다음에 만날 일 있으면 꼭 친하게 지냅시다. 8년 전 그때 만나지 말자고 했던 거 너무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