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Jan 04. 2023

그렇게 먹으면 맛있나요?

뭔가 언발란스한 조합을 추구하시는 분들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드라마와 함께 차인표 신드롬이 전국에 몰아치던 1994년 여름, 나는 대구에 있는 어느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 나이 먹을 때까지 험한 일 한 번 해본 적이 없던 내겐 그때의 경험으로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애환과 고충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되었고 그때 배웠던 각종 기술들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 동안 작지만 소중한 도움이 되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한 팀으로 일했던 사람들 이름과 얼굴이 비교적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고 지금도 그 자리에 가면 현장 사무소는 어디에 있었고 함바집(작업자들의 식당, 일본어 はんば에서 유래됨)은 어디에 있었는지 또렷하게 기억하지만 무엇보다 내 뇌리에 강력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내가 작업을 하던 바로 옆동에서 일하시던 김 씨 아저씨의 식습관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누구보다 빨리 함바집에 도착한 김 씨 아저씨는 항상 식판 한가득 밥을 퍼서 빈 냉면 사발 하나와 소주 한 병을 들고 자리에 앉으셨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땐 식사량이 많으셔서 반찬과 국은 따로 받아오시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식판에 퍼 온 밥을 냉면 사발로 옮겨 담은 후 거기에 소주 한 병을 그대로 때려 부으시곤 자연스럽게 소주에 밥을 말아 드시는 것이었다. 안주도, 반찬도 없이 맨 밥에 소주라니 충격도 그런 충격이 없었다. 


처음 그 장면을 보고 당황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게 작업반장님 포함, 오랜 기간 함께 일하셨던 어르신들께서 "저 영감, 저렇게 안 먹으면 일 못해."라며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그 습관이 하루이틀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도 김 씨 아저씨는 매 끼니마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소주에 밥을 말아 드셨고 그런 특이한 식습관은 내가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잊고 살았던 김 씨 아저씨가 다시 생각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잠자리에 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머리 위에 새집(Bird house)을 짓고 정확히 새벽 4시만 되면 가게를 찾던 그 고객은 '루틴'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날마다 똑같은 모습이었다. 세상 고뇌를 모두 짊어진 것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들어와 소주 한 병과 단팥빵을 고르고, 정확하게 금액에 맞춰 준비해온 지폐와 동전을 아무 말없이 카운터에 올려놓고 소주와 빵을 들고나가는 일련의 그 과정들이 흡사 복사해서 붙여놓은 듯 항상 똑같았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뭔가 조합이 어색하긴 했지만 설마 그 두 개를 같이 먹을까 생각했던 나는 그분을 처음 만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청소를 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가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가게 앞 벤치에 앉아 빵 한 조각 입에 넣고 소주 한 모금, 다시 소주 한 모금 마시고 빵 한 조각을 씹는 아저씨의 태연한 모습이었다. 하마터면 소주 안주로 빵을 드시는 건지, 빵을 먹다가 갈증이 나서 소주를 들이켜시는 건지 물어보고 싶은 충돌이 들 만큼 너무 자연스럽게 먹던 그 고객은 채 5분이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소주 한 병을 거뜬히 해치우고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로도 한동안 그분은 같은 시각, 같은 메뉴로 내 일상의 한 조각을 장식했다. 카운터에 올 때마다 소주와 단팥빵을 같이 먹으면 어떤 맛인지 꼭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자칫 말을 잘못 걸기라도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정도로 늘 험악한 표정을 짓기도 했고 내가 소설 <불편한 편의점>에 나오는 주인공 독고씨처럼 완력으로 누굴 제압할 수준도 아니거니와 손님에게 먼저 다가가는 살가운 성격도 아니기에. 언젠가 한 번이라도 표정이 좀 풀리면 꼭 물어보고 싶었으나 매일 새벽 4시만 되면 오시던 그 아저씨는 어느 때부터인가 더 이상 오지 않으셨고 소주와 단팥빵 조합의 비밀은 끝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카운터에 앉아 시식대를 바라볼 때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분들을 자주 보게 된다. 구운 계란과 오렌지 주스를 함께 드시는 분도 계셨고 최근 들어 자주 찾으셨던 여성 고객 중에서는 불난 입에 기름을 갖다 붓듯 불닭볶음면과 핫초코를 함께 먹는 분도 있었다. 샌드위치를 굳이 라면 국물에 찍어서 먹는 사람, 이온음료와 아이스티를 섞어서 원샷을 하는 사람까지 저렇게 먹으면 어떤 맛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희한한 조합으로 드시는 분들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퓨전요리, 퓨전음식이 일반화되고 기상천외한 조합의 요리들이 개발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뭘 어떻게 먹든 무슨 상관이냐고 하실 분들 계시겠지만 태생이 호기심 천국인 나로서는 궁금함을 참을 길이 없다. 아직까지 소주에 흰쌀밥을 말아서 드시던 그 옛날 김 씨 아저씨를 능가하는 분은 만나지 못했지만 얼마 전 소주와 단팥빵으로 김 씨 아저씨께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그분처럼 희한한 조합으로 나를 놀라게 할 고객이 또 언제 다시 나타날지 기대가 된다. 이 세상에는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