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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an 06. 2023

아저씨, 그거 피로회복제 아니라예

플라세보 효과는 실제 존재했다

몇 년 전 아침이 밝아올 무렵 택시 두 대가 가게 앞에 나란히 정차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기사님 두 분이 들어오신 적이 있다.

"뭐 마실래? 내가 오늘 장거리 한 탕 뛴 기념으로 쏜다. 커피는 좀 그렇재?"

"드링크 아무 거나 하나 마시면 되지 뭐."

친구 사이로 보이는 두 분 중 한 분이 냉장고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기능성 음료가 진열된 냉장고 문을 열고는 드링크 두 병을 꺼내길래 당연히 피로 회복제의 대명사인 박 씨 성을 가진 그분이나 XX 500을 꺼낸 거라 생각했다.


"자자~ 니 먼저 마시라. 내가 친절하게 이래 병도 따준다 아이가."

"에헤이~ 이 사람아, 계산도 안 하고 이라믄 안되지."

"계산은 나중에 하믄 되지. 이게 광땡 제약에서 만든 피로 회복제 아이가. 니도 알재? 쌍화탕 만드는 데."

"맞나? 캬~ 왠지 시원하이 속이 뻥 뚫리는 거 같디만 피로가 싹 풀리네."

예나 지금이나 성격 급한 손님은 있게 마련이듯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계산도 하기 전에 냉장고 앞에서 드링크 한 병씩 나눠 드신 두 분은 연신 감탄사를 자아냈다.


이윽고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온 두 분은 담배 두 갑을 주문하며 문제의 드링크 빈 병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주문한 담배를 진열장에서 꺼내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내 눈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분명 연두색 병이었다. 박 씨 성을 가진 그분이라면 짙은 청색이고 XX 500이라면 응당 주황색이어야 할 병이 연두색이라니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연두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쓰인 위X천, 두 분이 마신 것은 다름 아닌 소화제였다.


짧은 찰나의 순간, 사실대로 알리는 게 옳은 것인지 이대로 모른 척하는 게 옳은 것인지 갈등하던 나는 그 옛날 중학교 다니던 시절을 떠올렸다. 한문 수업시간 중에 모순(矛盾)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시는 선생님께 친구 한 녀석이 '아는 것이 힘이다'와 '모르는 게 약이다' 두 가지도 따지고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인데 그것도 모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황당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으며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모르는 게 약이다'를 택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엔 선생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다. 젊은 시절엔 아는 것이 힘이란 생각이 강했기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 떠벌리기에 급급했고 주변 사람들이 나의 해박한 지식수준을 우러러볼 때마다 끝 모를 자부심에 빠져 살기도 했었다. 그 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그 모든 게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알아도 모른 척하며 침묵을 지키는 횟수가 많아졌다.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서 때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음을 알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길지 않은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나는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드링크 한 병에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게 소화제 아니라 그냥 생수라 해도 굳이 말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언젠가는 두 분 모두 연두색 병에 든 피로 회복제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될 것이고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문 나를 탓할 날이 오겠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흥을 깨고 싶진 않았다.


그 일을 겪은 후 내겐 연두색 병을 들고 오는 고객마다 일일이 확인을 하는 또 하나의 버릇이 생겼다. 

"고객님, 이거 소화제라는 건 알고 가져오신 거죠?"

대부분의 고객들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간혹 숙취해소제로 착각하고 가져오시는 분이 있다. 그럴 때마다 오래전 그 택시 기사님 두 분이 떠오른다. 지금은 많이 늦은 감이 있고 당연히 알고 계시리라 믿지만 두 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다.


'아저씨들, 그거 피로 회복제 아니고 소화제거든요. 너무 당연한 듯 받아들이셔서 분위기 깰까 봐 그때는 차마 말씀 못 드렸는데 그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우리 아저씨들 어떻게 마시자마자 효과가 그렇게 직빵으로 나타난답니까? 약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듣습디다 그려.'


플라세보(또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란?

의사가 효과 없는 가짜 약 혹은 꾸며낸 치료법을 환자에게 제안했는데, 환자의 긍정적인 믿음으로 인해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이다. 심리적 요인에 의해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으로 위약(僞藥) 효과, 가짜약 효과라고도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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