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Jan 11. 2023

보낼 수밖에 없는 나는

아쉬움 한 스푼, 기쁨 한 사발의 이별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 이별도 찾아오는 법이라 했다. 예고된 이별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오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지난가을 은성이(가명)가 지방직 공무원에 최종 합격했다는 말을 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던 나였지만 그 소식은 이별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음을 뜻하는 것이기에 한편으로는 내 몸에서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픈 소식이기도 했다.


은성이는 꼬박 5년을 우리 가게에서 일한 근무자였다. 주말에 일하던 친구가 갑작스러운 취업으로 그만두게 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해 얼떨결에 일하게 된 케이스였기에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오래 일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었다. 보통 아르바이트 하는 아이들의 근무 기간이 평균적으로 1년을 넘기지 않는 게 현실이었기에 당연히 대학 졸업반이 되면 취업 준비를 위해 그만둘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랬던 은성이는 아내와 나의 예상을 비웃듯 만 5년이란 긴 시간을 우리와 함께 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주중에는 학교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주말 근무를 병행했고 뒤늦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늘 독서실과 가게를 오가며 단 한순간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던 은성이가 합격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수험생활이 길어지면서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엔 옆에서 지켜보기가 힘들어 그냥 포기하고 차라리 다른 길을 찾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꺼내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결코 해서는 안될 생각이겠지만 그대로 계속 시험에 떨어져서 오래도록 우리 가게에서 함께 일했으면 하는 간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지난해 12월 31일은 은성이가 마지막으로 근무하는 날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하루를 더 하나 하지 않으나 차이가 없을 것 같아 가족들과 함께 했으면 싶었지만 은성이는 끝까지 최선을 다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근무하기를 희망했었다.


마지막 교대를 하기 전 금고 정리를 하다가 예전에 일했던 근무자가 보낸 청첩장이 눈에 들어와 은성이에게 물었다.

"너도 나중에 결혼할 때 얘처럼 청첩장 보낼 거야?"

"그럼요. 도망가셔도 악착같이 찾아내서 두 손에 쥐어드릴 건데요."

"우리 돈 없으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지난번에 시험 치기 전에 고가(高價)의 초콜릿 사줬잖아. 그걸로 퉁치면 안 될까?"

"에이~ 그건 그거고 결혼은 또 다른 거죠."

일단 남자친구부터 만들고 생각하자는 내 말과 함께 짧은 대화는 끝을 맺었고 자주 보자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기분 좋게 헤어졌다.


음..... 그러니깐..... 글씨는 안 이쁜 걸로


다음날 출근하는 길에 깜빡 잊고 전달하지 못했다며 아내가 보내온 사진 한 장에는 은성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인사가 들어 있었다. 짧은 글을 여러 차례 곱씹어가며 읽는 도중 유독 '희로애락'과 '조카'라는 두 개의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일하며 얼마나 많은 진상을 만났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한 번도 그런 티를 내지 않은 은성이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어느새 내 나이를 유추할 수 있는 '조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를 서글픔이 전해졌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근무자들이 아내를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나이 차가 없었는데......


쪽지를 보며 그동안 함께 일했던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다. 아프리카 오지로 봉사를 떠났다가 아예 그 자리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서니, 전공을 살려 지역 보건소에서 일하며 아내가 임신했을 때 많은 도움을 줬던 희야, 본사에서 시상하는 서비스 에이스를 매월 받을 정도로 친절의 아이콘 같았던 지니, 처음 가게를 오픈했을 때 맺은 인연이 이어져 지금은 같이 늙어가는 40대 아줌마가 되어 버린 라니, 쉬는 날 없이 일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그만 두기 직전 야간 근무를 자청하면서까지 우리가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준 혀니까지 그들 모두는 우리 부부가 달리는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든든한 조력자이자 응원군이 되어 주었었다.


얼마 전 아는 누님께서 지나온 인연들에 대해 얘기하며 사람에게 잘해줘 봐야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분이 어떤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POS기에 있는 현금을 다 들고 도망간 근무자도 있었고 손님에게 사기를 당해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도 제대로 월급을 주지 않으면 노동부에 신고하겠다며 적반하장 식으로 말한 근무자, 어머니를 통해 일방적으로 무단결근을 통보한 마마보이 근무자까지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적이 몇 차례 있긴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진심을 다 하는 만큼 보답받는다는 기본적인 믿음은 버리고 싶지 않다.


은성이가 일을 그만둔 지도 열흘이 지났다. 새해를 맞아 정식 발령을 받은 은성이는 지역의 어느 주민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날이 밝고 지난 12월 월급을 정산하고 송금하는 것으로 은성이와 우리의 공식적인 인연은 끝을 맺게 된다. 다행히 은성이의 빈자리는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곧바로 채울 수 있었다. 


이제 내게는 두 가지 바람만 남았다. 새로 인연을 맺은 근무자가 은성이의 공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사히 연착륙하는 것과 은성이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스며들어 진정한 사회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조건이 모두 맞아떨어지면 우리의 이별도 아름답게 마무리될 것 같다. 세상에는 아픔보다 기쁨이 더 크게 느껴지는 이별도 있음을 은성이가 증명해 주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저씨, 그거 피로회복제 아니라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