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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an 20. 2023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역대급 삽질에 도전!!

더 미뤘다가는 감당이 안될 것 같았다. 글쓰기에 집중하기에도 빠듯한 인생인 몸이기에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미루고 미루던 작업에 돌입했다. 지난해 가을 카카오 대란이 일어났을 때 깨달은 바가 있어 내 글의 일부를 한글 파일로 전환해서 노트북에 따로 저장하는 과정까지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지만 언제 어느 시에 노트북이 사망할지도 모를 일이기에 이번에는 내친김에 외장하드와 USB에 옮기는 작업도 병행하기로 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발행했던 글들을 한글 파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읽다 보니 도무지 내가 쓴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형편없는 글들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훗날 시간이 날 때 하나씩 처리하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파일 저장 작업이 계속되면서 지난 글들을 하나씩 들여다볼 때마다 점입가경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전 쓴 글을 읽는 분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함과 함께 제발 좀 읽지 말아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까지 더해갔다. 하루라도 빨리 작업을 하는 게 옳겠다는 판단과 함께 일단 목록부터 작성했다. 어느 정도 완성의 단계에 이른 글과 의식의 흐름대로 휘갈겨 쓰고 고민 한 번 없이 바로 발행한 글, 그나마 한 두 번 정도 퇴고 비슷하게 했던 글까지 엉망으로 뒤섞인 것들을 각각의 단계별로 분류했다.


160개에 달하는 글을 정리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최대 난관은 여러 작가님들의 소중한 댓글에 미처 답글을 달지 못한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글들이었다.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에만 글을 쓰고 댓글과 답글을 달고 있는 처지라 그 이후 시간에 달린 댓글들은 모르고 넘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하나둘 모여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몰랐다면 그냥 넘길 수도 있겠지만 이미 알게 된 이상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개별 작가님들 이름을 한 칸에 모아두고 바쁘다는 핑계와 함께 감사 인사 겨우 한 줄 쓰는 편법을 동원하거나 봐도 못 본 척 슬그머니 덮고 넘어가는 무례함은 범하고 싶지 않았다. 깔끔한 성격과 프로 댓글러의 자존심상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개학을 하루 앞두고서야 엄마한테 맞아가며 초능력을 발휘하여 밀린 일기를 쓰고 온 가족이 매달려 방학숙제를 하던 그때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차이가 있다면 이 모든 작업을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롯이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과 하지 않는다고 때릴 사람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너무 많아서 눈이 아팠어.


엑셀을 이용해 그동안 발행한 글 제목을 하나하나 입력하고 답글이 누락된 글은 무엇인지 찾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중간에 몇 번 글쓰기를 중단했던 시점에 집중되어 있을 그 글들에 답글을 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내용의 연관성이 있는 글끼리 짝을 짓고 몇 개의 카테고리가 정해지면 그걸 바탕으로 브런치북 제작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세부적인 분류 작업도 병행했다.


'투고'든 'Two go'든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일, 미리 그때를 대비한다는 생각을 갖고 했기에 작업하는 내내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듯 할 수 있었다. 몇 번의 퇴고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번 달 말쯤이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틀이 갖춰질 거라는 믿음이 생기니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신감도 조금은 회복할 수 있었다. 지난 일 떠올려봤자 아무 소용없겠지만 겨우 형식만 갖춰 주먹구구식으로 부실공사하듯 뚝딱 만들어낸 작년의 무성의함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이번 삽질을 계기로 2023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를 향한 대장정은 이미 첫발을 내디뎠다. 왠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 같기도 하고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되는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모든 게 마무리되는 날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리는 쾌감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저질렀으니 내가 수습을 하는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끝까지 가볼 생각이다. 


하...... 그런데 글을 다 쓰고 보니 갑자기 현타가 오네. 하루라도 가만있지 않으면 손가락에 가시가 돋을 것 같아 걱정하는 나란 놈의 정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학창 시절 노트 정리하다가 체력이 바닥 나 정작 공부해야 할 시점이 되어서는 공부를 하지 못해 성적이 처참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러다가 글은 안 쓰고 줄기차게 정리만 하다가 막판에 뒷심 딸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어머니, 어찌 저를 이토록 쓸데없이 부지런한 놈으로 낳으시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깔끔한 성격까지 물려주셨습니까? 




<덧붙이는 글>

6개월도 더 지난 글에 갑자기 답글이 달렸다고 놀라지 마세요. 알림 설정은 뒷문제고 브런치 앱 자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라 모르고 퇴근 후 달린 댓글은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서 벌어진 일입니다. 너그러이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처럼 이런 상황 오기 전에 백업과 퇴고는 미리미리 해두시는 게 좋다는 말씀드립니다. 공모전을 나가든 브런치북을 만들든 투고를 하든 나중에 몰아서 하려면 힘들어질 겁니다. 글 발행 자체에만 너무 목숨 걸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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